대화는 가르치는 게 아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신 까닭에 힘들어 어쩌다가 일찍 집에 간 날, 일찍 온 아빠가 신기했는지 딸 아이가 옆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꺼냅니다. 요즘 새로 사귄 친구들 얘기, 공부 잘 가르치는 선생님 얘기 그리고 얼마 전에 고친 학교 매점 얘기… 일찍 집에 갔어도 일을 핑계 대면서 인터넷을 들여다 보던 아빠 옆에 앉아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쉴새 없이 말을 꺼냅니다.

인터넷 화면 들여다 보랴, 딸 아이 얘기 들으랴, 아무래도 정신이 흩어져있던 아빠는, 응응 그러면서 고개만 끄덕이는데 이 녀석이 갑자기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야. 아빠가 얘기를 잘 들어주잖아”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부랴부랴 컴퓨터를 끄고 딸 아이 눈을 바라봅니다. 오랜만에 일찍 온 아빠랑 수다를 떨 수 있어 마냥 좋아하는 딸 아이 표정을 보니, 내가 왜 진작 아이 눈을 보지 않았나,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눈을 마주 대고 이야기를 시작하니, 아무래도 더 깊은 얘기가 나옵니다. 관절염 진단받은 할머니가 어떻게든 수술 안 하려고 운동하신다는 얘기, 할아버지 옆에서 애교 떤 얘기, 스마트폰 사고 싶은데 시험 기간 때문에 걱정이라는 얘기… 바쁘다는 핑계로 아빠는 미처 알지 못했던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딸 아이를 통해 듣습니다. 곧 다가올 시험을 걱정할 땐 아빤 성적 따위엔 관심 없다는 말로 달래기도 하고, 시험공부해야 하는데 한 번 손에 잡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가 정말 재미있어 읽고 싶어 죽겠다고 할 땐 그냥 읽으라고 대책 없이 말합니다(애 엄마가 알면 또 한마디 잔소리들을 일입니다만).

사진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11739182@N03/1263985679/

요즘 아이와 부모의 가장 큰 문제는 대화가 없는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화라는 거,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는 말도 없다가, 그래, 자 우리 대화해보자, 라고 얘기를 꺼내면 모르긴 몰라도 열이면 팔, 구는 싸웁니다. 그럼 어쩌라고? 대화 없다고 뭐라 그러기에 대화하려 했더니 그러면 싸운다고? 어쩌란 말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딸 아이 친구가 이런 얘기를 했답니다.
“우리 아빠는 나한테 딱 한마디만 해. ‘공부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그저 응, 응 고개만 끄떡여. 듣지도 않으면서. 그러니까 아빠랑 말하기가 싫어. 아빠도 내가 말 안 거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
아이와 대화가 없는 건 100% 부모 책임입니다. 부모가 들어줄 생각은 안 하고 할 말만 하니 대화가 없는 거지요. 말하기 전에 먼저 아이 얘기를 들어주고, 아이가 말하게 해야 합니다. 아빠가 내 얘기를 들어준다고 알고 있으면 아이는 말하지 말라고 해도 와서 말합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서 말해봐야 아무 소득이 없는데 왜 가서 말합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말하고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줘야 한다고요. 누구는 이렇게 키우면 버릇없어진다고 말하는데, 버릇은 들어준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책임지는 방법을 안 가르쳐서 그런 거지.

Conversation

대화는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들어주고, 대답하고, 아빠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주는 것, 그게 대화입니다. 아빠와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면 아이는 언제든 와서 말할테고, 그럴 때 눈을 마주치면 아이의 진심과 고민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딸은 나한테 와서 통 말을 안해… 라고 말하기 전에 아이가 말하고 싶은 환경을 만들었는지 다시 한 번 반성해볼 일입니다. 반성합시다. ㅜㅜ
/ FIN

  • Favicon of http://pp19in.egloos.com BlogIcon 뽀다아빠 네모 2011.04.08 09:3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음. 정말 가슴에 와 닿은 말씀이시네요....맞아요....그런데 잘 안되요. 이궁 ^^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1.04.08 09:50 신고 수정/삭제

      ^^ 그래서 아빠 하기 어려운 겨 ㅜㅜ
      잘 지내시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