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포장마차엔 할머니가 없다

그냥 머리가 복잡했다, 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머리가 복잡한 덴 다 이유가 있었다. 숫자가 안 맞았다거나, 아이가 속썩였다거나, 왠지 앞날이 좀 흐려 보이는 그런 일들이 한데 어우러져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하지만 미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선 이 복잡한 걸 누구에게 말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왜냐고? 준비가 안 됐으니까. 왜 복잡한지 풀어 말할 준비를 못 했으니까. 


이런 날은 뭐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힘겹다. 다행히 내 눈치를 챘는지(하긴, 나는 표정을 잘 못 감춘다), 그가 말했다. 할머니 포장마차 갈까? 아, 그래. 괜스레 머리 복잡한 날 포장마차처럼 좋은 솔루션도 드물다. 좁고 시끄럽고 불편하고 별로 안 깨끗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부담 없이 안주를 시키고, 격하게 소주 잔을 부어 제치면서 똑같이 시끄러우면 되니까. 시끄러움 속에 머리를 묻어 버릴 수 있으니까. 


송파구 방이중학교 앞 할머니 포장마차.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저녁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 좁은 가게 안엔 이미 손님이 절반 넘게 차 있다. 남들이 차지하고 앉은 테이블 사이 끼어 있는 테이블로 비집고 들어가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흔들어 자리를 내었다. 이미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세 병째로 넘어간 아저씨 두 사람이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우긴 했지만, 여기선 별로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이름과 달리 가게 안에 할머니는 없다. 그저 아줌마들. 주문하겠노라고 불러도 아줌마들은 못 들었는지 못 들은척하는지 올 생각을 안하고, 우리는 멀뚱하니 앉아 있다. 주방 쪽으로 가서 주문해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아줌마가 옆 테이블 음식을 날라오면서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간다. 아하, 옆 테이블 음식 가져다 주면서 주문받으려는 모양이고나. 그저 조금 성급했다는 생각에 픽 웃었다. 하긴, 주문 좀 천천히 한다고 달라질 게 머 있나. 


꼬막, 국수, 소주 한 병, 그리고 주꾸미 볶음 맵게요. 


나름 복잡한 주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주 상표만 물어보고는 후딱 지나가는 아줌마. 그리고 잠시 후 기본 찬과 소주, 그리고 꼬막이 나왔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잔을 채우는 거다. 젓가락을 들이밀기 전에. 아, 물론 나는 폰카를 먼저 들이댔지만. ^^



첫 잔은 절대 꺾지 않는 법. 언젠가는 이 원칙을 버릴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리고 꼬막. 이 집 꼬막은 그저 단순하다. 마늘, 매운고추와 함께 삶아 내는 것. 원래 꼬막은 반 삶아 적당히 핏물이 비치게 먹어야 맛있지만 이 집에선 그런 걸 따질 일이 없다. 포장마차니까. 한 접시에 1만2천 원이니까. 심지어 국산인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입 안 소주 기운이 가시기 전에 잘 벌어진 녀석을 까 넣으면 된다. 짭짤하고 쫀득하다. 함께 나온 양념장에 찍어 씹으면 고소하다. 됐다. 더 이상 뭘 바랄꼬. 그리고 다음 잔. 주꾸미가 나오기 전에 이미 소주는 반 병이 넘게 사라졌다. 



이 집 대표메뉴인 멸치국수. 4천 원. 더 바랄 것도 없는, 그 멸치국수에 그 가격이다. 저녁을 먹지 않고 시작한 술 자리에 저녁 식사 용으로도 좋고, 국물 안주로도 좋고 마무리 식사로도 좋다. 



꼬막에 멸치국수로 소주 한 병을 다 비웠을 무렵 주꾸미 볶음이 나왔다. 알루미늄 포일에 쌓인 딱 포장마차다운 주꾸미 볶음. 주문대로인지 매운고추가 넉넉히 들어가 매콤한 맛 하나는 일품이다. 고급스럽지도, 주꾸미가 넉넉하지도 않지만 딱 1만5천 원 값어치는 한다. 소주 한 병 더 먹을 안주로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얘기를 했을까. 학생들에게 책 사라고 했다던 마교수 얘기를 했고, 아이 걱정도 했다. 회사 얘기도 했겠고, 서로 아는 사람들 얘기도 했겠지. 약간 감정을 과장해가며 수다를 떨다 보니 살짝 오른 취기에 복잡한 머리는 잠시 잊었다. 대신 살짝 감기 기운을 얻었다고나 할까. 2차 없이 돌아간 집에선 내내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와 복잡한 머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기꺼이 재채기를 선택하겠다. 남들이 보기엔 좀 흉할지 모르겠으나. 물론 재채기는 가려서 할 계획이다. 재채기라도 계획대로 된다면.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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