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실의 목로주점 vs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저는 목로주점이 뭔지 잘 모르는 세대입니다. 제가 아는 목로주점은 '흙바람 벽에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는' 아주 로맨틱한 목로주점 뿐입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처음 만났을 땐 무척 로맨틱한 이야기일거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왠걸, 제가 생각했던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참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그때는 왜 이 책 제목을 목로주점으로 번역했을까 같은 고민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전 대학 다닐 땐 술을 거의 안 마셨거든요. 아마 대학 내내 마신 술이 소주 한 병, 맥주 두 병 정도 될 겁니다. 술에 관심도 없으니 주점을 뭐라 번역한들 저하고는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흔이 넘고, 술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지금 다시 목로주점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목로주점이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전을 찾아보니 '목로'라는 게 '널빤지로 만든 좁고 긴 상' 이랍니다. 이런게 있는 술집이 목로주점이고요. 그래서 아, 이게 나름 바(Bar) 같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제 상상력이 부족해선지 저는 도저히 목로주점이 어떤 술집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목로주점 이미지를 찾아봤지만 그 어느 사진도 오리지널 목로주점을 보여주진 않았습니다. 


그나마 찾은 정보를 정리하면 목로주점이란 구한말에 등장한 서민 술집이랍니다. 허름한 술집 안에는 널빤지 상이 하나 있고 그 위에는 안주거리가 올라가 있다는 거지요. 술을 시켜서 이 안주와 함께 마시는 집이었는데 안주는 기본으로 제공하고 술값만 내면 됐다는 겁니다. 대신 의자가 없이 서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선술집(서서 먹는 술집)으로 슬슬 이름이 바뀌지 않았을까, 그런 추측을 해봅니다. 


여기까지 뒤지다 보니 어라, 내가 뭔 뻘짓을 하는 거지? 번역이야 무엇이든 원 제목인 L’Assommoir 가 뭔지 찾아보면 되는 거잖아? 하는 생각을 했더랍니다. 이젠 다 까먹은 프랑스어 지식을 동원해 찾아낸 게 바로 이 그림입니다. 1900년대 파리 술집 풍경이라네요. 



돈 없고 가난한 서민들이 앉아서 오래동안 마실 수는 없고 그저 서서 그날 하루의 시름을 달래는 곳. 그런게 L’Assommoir였는가 봅니다. 여기까지 만족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자해설에 딱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목로주점을 뜻하는 프랑스어 Assommoir는 원래 보통 명사로서 짐승을 도살하는 데 사용되는 도살용 몽둥이라는 뜻과 불순한 술을 파는 술집 또는 술집 주인이라는 뜻을 지닌다."


목로주점(하) 역자해설 중에서, 유기환, 열린책들

 

아하, 그렇지. 이런 뉘앙스가 있는 술집이 이 소설의 배경이 되어야지.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는 목로주점은 절대 이 소설의 배경이 아닌게야. 하지만 왜 목로주점이라고 번역했을까요. 선술집, 대포집 등의 어감보다는 목로주점의 어감이 훨씬 '문학답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콜롱브 영감의 목로주점에 있는 기다란 카운터를 목로라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여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목의 어감을 이해하고 나니 목로주점에 몰입하기가 좀 더 쉬웠습니다(라고 우겨봅니다. ^^ 안 그러면 목로주점을 찾아 헤맨 시간들이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자, 그럼 콜롱브 영감의 목로주점에선 무슨 술을 팔았을까요? 


"콜롱브 영감의 <목로주점>은 푸아소니에 가와 로슈슈아르 대로가 만나는 길모퉁이에 있었다. 간판에는 끝에서 끝까지 푸른 글자로 기다랗게 쓰인 하나의 낱말, <증류주 Distillation>라는 하나의 낱말만이 보였다."


목로주점(하), 에밀 졸라, 유기환 옮김, 열린책들


네, 증류주를 팔았겠네요. 게다가 이 주점에는 증류기도 있었습니다. 가히 악마의 부엌이라고 부를만할 증류기가요. 콜롱브 영감이 어떤 술을 증류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아마 과일 술을 주로 증류했을 겁니다. 포도로 만든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가 제일 많았을 것 같네요. 실제로 영어판에는 브랜디라는 표현이 중간 중간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마시는 이런 고급 브랜디는 아니었을 겁니다. 싸구려 와인을 증류해 만든 싸구려 브랜디로 도수도 일정하지 않고 맛도 거칠었겠지요. 하지만, 고단한 서민이 잠시 자기 삶을 잊고 영혼을 내려 놓을 수 있기엔 충분했습니다. 내려놓은 영혼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목로주점은 꽤 훌륭한 안식처였겠지요. 그러나 결국 자제하지 못하고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목로주점은 이 불행한 비극의 제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연실의 목로주점과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 겹치면서, 저는 목로주점의 정체성을 혼돈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로주점의 이미지는 여전히 이연실에 남겨두렵니다. 술이란 약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 마시면 언제든 약이 되는 법이라는 걸 전 알고 있으니까요.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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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서미 2013.08.25 15:0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좋은 글 고맙습니다.
    목로주점 읽어봐야겠어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3.08.26 00:10 신고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읽은 걸 후회하진 않으실 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