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속 브랜디 #3, 이방인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레몽은 내게 고급 브랜디를 한잔 사주었다. 그런 다음 그는 당구를 한판 치고 싶어 했다. 내가 아슬아슬하게 졌다. 게임이 끝난 후 레몽이…"


-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예령 옮김, 열린책들 


뫼르소는 동네 사람들이 포주라고 여기는 레몽과 친구가 됩니다. 남들이 다 흉보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까닭은 '안 그럴 이유가 없어서'였습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레몽이 자기 집에서 정부를 때리다가 경찰에게 수모를 당합니다. 경찰이 가고 난 후 레몽은 뫼르소에게 와서 이런 저런 하소연을 하고, 나중에 경찰서에 불려가면 증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뫼르소는 그러기로 합니다. 급 기분이 좋아진 레몽이 뫼르소를 데리고 나가 비싼 브랜디를 사줍니다. 자기 편을 들어주는 뫼르소에게 한턱 쏘는 거지요. 그리고 2차로 당구를 치고 3차로 또 어디를 가자고 하지만 뫼로소는 거절합니다. 어째 노는 분위기가 한국 남자들하고 좀 비슷합니다. 세상 남자들은 다 똑같은 모양입니다. ㅋ 여튼. 


도대체 어떤 브랜디길래 고급 브랜디라고 했을까요? 다 아시는 것처럼 브랜디에는 VS, VSOP, XO 같은 등급이 있는데 레몽은 어떤 등급을 사줬을까요? 그건 모르겠고요. ^^ 


브랜디에는 몇 가지 등급이 있는데요, Bureau National Interprofessionnel du Cognac, 줄여서 BNIC, 우리 말로 하면 꼬냑국제사무국 정도로 해야할까요, 여기서 정의한 몇 가지 등급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VS는 Very Special의 약자입니다. 증류한 후 오크통에서 최소 2년은 숙성시켜야 VS를 붙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2년이란 기준이 중요한데요, 기준 일은 4월 1일입니다. 그러니 늦어도 3월 31일까지는 증류해서 통에 넣어야 하지요. 4월 1일 기준으로 통에 들어간 녀석은 Compte 0 즉 0살이고요, 이듬해 3월 31일 지나면 Compte 1 즉 한 살이 됩니다. 2년이란 Compte 2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Compte는 꽁뜨라고 읽으면 되겠고요 영어의 Count입니다. 


다음 VSOP는 Very Superior(혹은 Special) Old Pale의 약자입니다. 4년 이상 숙성, 즉 꽁뜨가 최소 4는 되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여기서 왜 Very Light Colored 라는 뜻의 Pale 이란 말이 붙었느냐 하면요… 브랜디에 맛과 색깔을 넣으려고 설탕과 카라멜 같은 걸 첨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1817년에 영국 왕실에서 그딴 거 넣지 않은 순수한 브랜디를 내놔라, 해서 Pale 이란 말을 갖다 붙였다는군요. 네, VSOP 급은 설탕이나 카라멜 같은 게 안 들어간 순수한 브랜디란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XO는 Extra Old고요, 최소 6년 이상 숙성해야 이 등급을 붙일 수 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우리가 꼬냑 얘기들어 보면 20~30년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70년 묵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겨우 6년 이상 숙성했는데 XO급이라는게 좀 이해가 안됩니다. 



일단 '최소'라는 표현에 집중합니다. 최소라는 말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붙일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실제로 제조사들은 그보다 훨씬 오래 숙성시켜 브랜디를 만듭니다. XO급은 적어도 20년에서 많게는 70년 혹은 그 이상 숙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왜 기준 년도를 이렇게 낮게 매겨놨을까요? 


브랜디는 포도를 발효시켜 와인을 만든 후 이 와인을 증류해 만듭니다(아, 물론 좀 더 복잡한데 그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 이 와인을 오크 통에 넣고 숙성시키는 거지요. 그런데 이 포도라는 녀석이 매년 품질이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좋고, 또 어떤 때는 나쁘고… 그러다 보니 언제 포도를 썼느냐가 중요하고 포도에 따라 품질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불규칙한 품질은 물론 알콜 도수나 색깔 등등을 맞추기 위해 여러 통의 브랜디 원액을 섞어 최종 상품을 만듭니다. 오래 숙성한 브랜디는 40% 이상 날라가기 때문에 양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양이 줄어든다는 얘기는 무척 비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덜 숙성한 브랜디를 타서 양을 늘리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섞다라는 뜻의 블렌딩이라고 부르고 블렌딩 하는 사람을 마스터 블렌더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블렌딩은 회사의 핵심 기술일 수 밖에 없어 마스터 블렌더는 대부분 오너가 겸임합니다. 


여러 통을 섞다 보면 오래 숙성한 것도 있고 좀 덜 숙성한 것도 있고 이제 막 통에 넣은 것도 있겠지요. 이때 가장 덜 숙성한, 어린 브랜디를 기준으로 등급을 매깁니다. 30년 묵은 브랜디에 2년짜리 브랜디를 섞어버리면 VS급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XO급이 되려면 적어도 6년 이상 묵은 브랜디를 섞어야 한다 이런 원칙인 게지요. 그런데 대부분 브랜디 업체들은 가장 오래된 브랜디 햇수만 얘기하지 어린 브랜디 햇수는 얘기 안합니다. ^^ 


물론 섞지 않고 한 통의 브랜디 원액을 그대로 내놓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싱글 몰트처럼 싱글 브랜디 비슷하게 부르기는 한데 워낙 비싸서 만들지도 않고 당연히 구하기도 어렵답니다. 


참고로 여기 말한 등급 말고도 제조사 별로 엄청 많은 등급 표시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열나 풍년이 들어 좋은 포도가 나와 그때 만든 버전을 나폴레옹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생긴 나폴레옹 등급, XO 보다 한 등급 위로 치는 Extra 등급… 특별히 남겨뒀다 해서 리저브 등급… 다 업체의 마케팅에서 생겨난 것들이라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VSOP와 XO 사이 정도라고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유명한 브랜디는 죄다 꼬냑인데 브랜디 관련 용어는 죄다 영어입니다. 이건 영국 사람들이 브랜디를 엄청 사 먹었기 때문이랍니다. 돈 내는 사람이 왕인게지요 뭐.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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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속 브랜디 #2, 적과 흑

스탕달의 적과 흑. 사랑이란 걸 처음하는 쥘리앵과 레날 부인의 줄다리기가 옛날 생각나게(!) 만듭니다. ^^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서로 교차하는 그 복잡한 감정을 스탕달이 잘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샴페인, 포도주(특히 말라가 와인) 얘기가 좀 나오는데요, 사실 저는 와인은 잘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고, 마실 일도 없어서 ^^ 뭐 딱히 할 얘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책 뒤쪽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결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총알 한 발이 쥘리앵의 팔을 맞혔다. 그들은 쥘리앵의 다친 팔을 손수건으로 동여매고 그 위로 브랜디를 흠뻑 부었다. 기사 보부아지는 자신의 마차로 쥘리앵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쥘리앵이 라 몰 저택을 대자 이 젊은 외교관과 친구는 뭔가 눈짓을 주고 받았다."


- 스탕달, 적과 흑(하), 열린책들 


라 몰 후작 댁에서 지내게 된 쥘리앵이 어느 날 파리 시내에 나갔다가 비를 피하느라 어느 카페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왠 인상 드런 사내와 마주치지요. 그 사내가 쥘리앵을 빤히 쳐다보는데 쥘리앵은 이 시선에서 열나 모욕을 느낍니다. 그래서 왜 쳐다 보냐? 한 마디 했더니 상대가 욕설을 했다 이거지요. 젊은 혈기로 쥘리앵은 결투를 신청하고 사내는 명함 몇 장을 집어던집니다. 다음 날 명함에 있는 주소로 찾아간 쥘리앵은 정작 명함 당사자는 어제 그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황당해하고는 결투 없이 물러나려는데, 아, 그 집 마부가 범인이었습니다. 마부가 주인 명함을 던진 거지요. 명함 주인은 마부를 쫓아내지만 자기가 데리고 있던 사람이 벌인 일은 자기가 수습해야 한다고 잘난 뽕을 떨어 결국 쥘리앵과 명함 주인 기사 보부아지가 결투를 합니다. 뭐, 결과는 싱겁습니다. 쥘리앵이 한 방 맞고 끝. 이 상처에 기사는 브랜디를 콸콸 쏟아 붓습니다. 


이 장면은 서부 영화나 전쟁 영화 같은 데서 많이 보셨을 겁니다. 총 맞은 상처에 위스키를 콸콸 붓고 열나 괴로워하는 장면 말이지요. 뭐 지금은 40도 정도지만 그땐 도수가 47-8도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여튼 의약품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소독용으로는 아주 좋았겠지요. 브랜디는 먹는 약 대신으로도 쓰였지만 상처를 소독하는데도 쓰였습니다. 상비약인 셈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브랜디를 항상 들고 다녔을 겁니다. 뭐 마시기도 하고, 응급약으로도 쓰고. ^^ 


심심해서 넣은 Camus XO ^^


이건 좀 뻔한 얘기고 ^^ 다시 브랜디 얘기를 조금 더 하면… 발효시킨 와인을 잘 마시던 사람들이 왜 브랜디를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몇 가지 설이 있는데요. 


첫째는 세금 문제입니다. 옛날에도 세금 뜯기 가장 좋은 방법이 술에 세금을 붙이는 거였습니다. 와인에 세금을 좀 세게 붙이니까 와인을 끓여 브랜디를 만든 거지요. 뭐, 몰트 위스키에 세금을 열나 붙이니까 보리 말고 다른 곡식으로 위스키를 만든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 맥주나 소주가 너무 일관성 있게(!) 된 것도 사실 우리나라 주세 관련 법 때문이기도 합니다. ^^ 


둘째는 보관과 유통 때문입니다. 냉장 시설이 없을 때니 발효주는 상하기 쉬운데 증류주는 상하지 않으니까 오래 보관하고 멀리 유통하려고 끓였다는 겁니다. 실제로 포트와인 같은 경우도 포르투갈에서 영국까지 보내야 하는데 이 동안 상하니까 브랜디를 조금 섞었다는 거지요. 그랬더니 얼라, 더 맛있더라, 그래서 태어났다고들 합니다. 


셋째는 남은 와인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다가 끓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사실 보관 문제하고도 연관있습니다. 남은 와인 버릴 수도 없고, 이 상태론 보관할 수도 없어서 증류했다는 거지요. 


뭐 여러가지 설이 있겠으나 전 이 세 가지가 다 적당히 섞여 브랜디가 탄생했을 거라고 봅니다(쓰고나니 몹시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요 ^^) 


다음에 상처날 땐 후시딘 대신 브랜디를 한 번 뿌려볼까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음에는 브랜디 등급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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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속 브랜디 #1, 순수의 시대

"그는 아내의 얼굴이 몹시 창백한 것을 보고 브랜디를 좀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열린책들 중에서 


아처는 엘렌을 사랑하는 자기 마음을 아내인 메이에게 고백해야겠다는 열망에 빠집니다. 아, 하지만 아처는 메이가 이미 그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남자들, 대개 다 이렇습니다. ㅜㅜ 오페라 극장에서 서둘러 메이를 데리고 오던 길, 메이는 마차에 걸려 넘어지고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를 찢어 먹고 맙니다. 마치 그들의 결혼에 흠집이 나기 시작한 것처럼. 집에 올라온 아처는 메이의 표정이 창백하다 생각하고 브랜디를 마시겠냐고 권합니다. 어쩌면 아처 스스로 마시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순전하고 예쁜 아내에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할 판이니까요. 과연 아처는 고백을 했을까요? 


브랜디를 마셨다는 얘기는 안 나오니까, 아마 고백 못 했을 겁니다…(라고 쓰자니, 스포일러도 아니고 참 ㅜㅜ) 여튼, 중요한 건 창백한 메이에게 브랜디를 권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약품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엔 술이 의약품 역할을 꽤 했습니다. 위스키의 어원이 '생명의 물'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묘한 액체를 사람들이 처음에 어떻게 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위스키는 물론 브랜디, 맥주도 약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진은 아예 의약품으로 개발된 술이기도 하지요. 만화에도 꽤 등장하는 알프스 구조견 세인트 버나드는 목에 통을 하나씩 매고 다니는데 그 통에 브랜디가 들어 있답니다. 추위에 얼어 죽기 직전인 사람들에게 브랜디는 몸을 녹여주는 대단한 효과가 있어서 일겁니다. 


출처. http://tvtropes.org/pmwiki/pmwiki.php/Main/SaintBernardRescuehttp://tvtropes.org/pmwiki/pmwiki.php/Main/SaintBernardRescue


브랜디는 과일을 증류해서 만든 술입니다. 곡식을 증류하면 위스키, 과일을 증류하면 브랜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아, 물론 곡식이나 과일을 발효 시키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지만, 재료에 따라서 이렇다는 거지요. 기회가 되면 증류 과정도 알아보겠습니다. 


포도를 증류해 만든 꼬냑이 대표적인 브랜디입니다. 그러니까 꼬냑은 브랜디의 한 종류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워낙 꼬냑이 유명해서 꼬냑 = 브랜디 라고 알기도 하는데요, 뭐, 이런 표현이 있더랍니다. 


모든 꼬냑은 브랜디지만 모든 브랜디가 꼬냑은 아니다. 


브랜디라는 이름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포도 증류주를 수입하면서 태운 포도주(증류했으니 이렇게 부를 수도 있지요. 사실 소주도 태워 만든 술이란 뜻이니까요 ^^) 라는 뜻의 '브란데 웨인'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영국으로 넘어가서 브랜디가 됐다고 합니다. ^^ 



꼬냑은 프랑스 꼬냑 지방에서 생산한 브랜디를 부르는 말이고요, 마찬가지로 아르마냑 지방에서 생산한 넘들은 아르마냑이라고 부릅니다. 아르마냑이 꼬냑보다 150년 정도 앞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아르마냑 보다 꼬냑을 더 쳐주기는 합니다. 아, 참고로 아르마냑 지방은 예전엔 가스코뉴족이 살았던 곳이라 가스코뉴라고도 부르는데요… 가스코뉴, 왠지 낯이 익지요? 삼총사에 나오는 달타냥이 요기 출신입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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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seanjk.com BlogIcon sean 2013.03.29 18:0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볼께요. : )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민트 줄렙

괜히 그런 날이 있어.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고 싶은 날. 

어차피 주인공처럼 멋지진 않으니 

주인공을 따라 술이나 마실 수 밖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가 

민트 줄렙을 만났어. 


하지만 속옷이 축축한 뱀처럼 다리를 휘어 감고 

땀방울이 등줄기를 시원하게 가르던 몸의 기억만은 생생하다. 

이 생각은 욕실 다섯 개를 빌려 

시원하게 냉수욕이나 하자는 데이지의 제안에서 비롯되어 

<민트 줄렙을 마실만한 장소>라는 형태로 좀 더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소설 속 장면은 멋지지 않아. 

옛 연인인 개츠비와 데이지, 그리고 데이지 남편 톰. 

아슬한 삼각관계가 정면 충돌하기 직전. 

숨막히는 긴장감과 짓누르는 더위 때문인지 

데이지는 민트 줄렙을 마시자고 그러지. 


민트 줄렙 


버번 위스키 45ml

민트

설탕


버번 위스키와 민트 잎, 설탕을 잘 찧고 

얼음으로 잔을 채워 만든 

정말 미국스러운 칵테일. 


날씨가 덥진 않았지만 

왠지 민트 줄렙이 땡겼어. 



가끔 가지만 그닥 좋아하지 않는 바에서 

민트 줄렙을 시켰지. 

강한 버번향, 상큼한 민트

독한 맛 뒤에 묻어나는 설탕의 달콤함. 

그런데 솔직히 맘에 안 들었어. 


어랏? 이게 왜이래? 하고 베이스를 확인했더니 

짐빔 화이트로 만들었다더군. 

짐빔, 어릴 때 몇 번 마셨는데 

그럴 때 마다 아팠거든. 그래서 싫어해. 


베이스를 확인하지 않은 건 내 실수니까 

굳이 따지진 않았고 그냥 조금 남겼어. 

언제나 그렇듯이 

민트 줄렙 만으로 끝나진 않으니까. 


뭐 어때. 

가끔 실수로 싫어하는 술도 마시는 거 

이런 게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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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포장마차엔 할머니가 없다

그냥 머리가 복잡했다, 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머리가 복잡한 덴 다 이유가 있었다. 숫자가 안 맞았다거나, 아이가 속썩였다거나, 왠지 앞날이 좀 흐려 보이는 그런 일들이 한데 어우러져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하지만 미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선 이 복잡한 걸 누구에게 말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왜냐고? 준비가 안 됐으니까. 왜 복잡한지 풀어 말할 준비를 못 했으니까. 


이런 날은 뭐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힘겹다. 다행히 내 눈치를 챘는지(하긴, 나는 표정을 잘 못 감춘다), 그가 말했다. 할머니 포장마차 갈까? 아, 그래. 괜스레 머리 복잡한 날 포장마차처럼 좋은 솔루션도 드물다. 좁고 시끄럽고 불편하고 별로 안 깨끗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부담 없이 안주를 시키고, 격하게 소주 잔을 부어 제치면서 똑같이 시끄러우면 되니까. 시끄러움 속에 머리를 묻어 버릴 수 있으니까. 


송파구 방이중학교 앞 할머니 포장마차.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저녁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 좁은 가게 안엔 이미 손님이 절반 넘게 차 있다. 남들이 차지하고 앉은 테이블 사이 끼어 있는 테이블로 비집고 들어가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흔들어 자리를 내었다. 이미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세 병째로 넘어간 아저씨 두 사람이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우긴 했지만, 여기선 별로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이름과 달리 가게 안에 할머니는 없다. 그저 아줌마들. 주문하겠노라고 불러도 아줌마들은 못 들었는지 못 들은척하는지 올 생각을 안하고, 우리는 멀뚱하니 앉아 있다. 주방 쪽으로 가서 주문해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아줌마가 옆 테이블 음식을 날라오면서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간다. 아하, 옆 테이블 음식 가져다 주면서 주문받으려는 모양이고나. 그저 조금 성급했다는 생각에 픽 웃었다. 하긴, 주문 좀 천천히 한다고 달라질 게 머 있나. 


꼬막, 국수, 소주 한 병, 그리고 주꾸미 볶음 맵게요. 


나름 복잡한 주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주 상표만 물어보고는 후딱 지나가는 아줌마. 그리고 잠시 후 기본 찬과 소주, 그리고 꼬막이 나왔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잔을 채우는 거다. 젓가락을 들이밀기 전에. 아, 물론 나는 폰카를 먼저 들이댔지만. ^^



첫 잔은 절대 꺾지 않는 법. 언젠가는 이 원칙을 버릴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리고 꼬막. 이 집 꼬막은 그저 단순하다. 마늘, 매운고추와 함께 삶아 내는 것. 원래 꼬막은 반 삶아 적당히 핏물이 비치게 먹어야 맛있지만 이 집에선 그런 걸 따질 일이 없다. 포장마차니까. 한 접시에 1만2천 원이니까. 심지어 국산인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입 안 소주 기운이 가시기 전에 잘 벌어진 녀석을 까 넣으면 된다. 짭짤하고 쫀득하다. 함께 나온 양념장에 찍어 씹으면 고소하다. 됐다. 더 이상 뭘 바랄꼬. 그리고 다음 잔. 주꾸미가 나오기 전에 이미 소주는 반 병이 넘게 사라졌다. 



이 집 대표메뉴인 멸치국수. 4천 원. 더 바랄 것도 없는, 그 멸치국수에 그 가격이다. 저녁을 먹지 않고 시작한 술 자리에 저녁 식사 용으로도 좋고, 국물 안주로도 좋고 마무리 식사로도 좋다. 



꼬막에 멸치국수로 소주 한 병을 다 비웠을 무렵 주꾸미 볶음이 나왔다. 알루미늄 포일에 쌓인 딱 포장마차다운 주꾸미 볶음. 주문대로인지 매운고추가 넉넉히 들어가 매콤한 맛 하나는 일품이다. 고급스럽지도, 주꾸미가 넉넉하지도 않지만 딱 1만5천 원 값어치는 한다. 소주 한 병 더 먹을 안주로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얘기를 했을까. 학생들에게 책 사라고 했다던 마교수 얘기를 했고, 아이 걱정도 했다. 회사 얘기도 했겠고, 서로 아는 사람들 얘기도 했겠지. 약간 감정을 과장해가며 수다를 떨다 보니 살짝 오른 취기에 복잡한 머리는 잠시 잊었다. 대신 살짝 감기 기운을 얻었다고나 할까. 2차 없이 돌아간 집에선 내내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와 복잡한 머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기꺼이 재채기를 선택하겠다. 남들이 보기엔 좀 흉할지 모르겠으나. 물론 재채기는 가려서 할 계획이다. 재채기라도 계획대로 된다면.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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