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불과 파란불

나는 아직도 '파란 불'에 횡단보도를 건넌다. '파란불이다~ 가자~' 라고 말할 때마다 초등학교 4학년 딸 아이는 '아빠, 왜 초록불을 파란불이라고 해?'라고 따진다. 내가 봐도 틀림없이 초록불인데, 왜 난 여전히 파란불이라고 말하는 걸까.

가만히 생각하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어릴 적 우리는 틀림없이 파란불이 켜지먼 건너라고 배웠다. 그 아무도 초록불이라고 하지 않았고 파란불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 때는 초록불을 파란불이라고 하는데 아무도 따지지 않았을까.

'아빠 어릴 땐 그렇게 배웠어'라고 옹색한 변명을 해 보지만 딸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하긴 알아듣기 어려울 법도 하다. 세상에, 누가 초록불을 당당하게 파란불이라고 가르쳤단 말인가. 그 덕에 전 국민이 초록색을 느끼지 못하는 색맹에 거려 버리고 말으니. 교육이란 그래서 중요하고, 그래서 더 무서운 거다.

아마, 우리가 대학 시험을 볼 1987년 경부터 논술 시험이 생겼을 터이다. 논술에 대해 별도로 가르칠 방법이 없는 학교에서는 오로지 신문 사설 베껴 써오기를 열심히 시켰다. 신문사설을 오려 공책에 붙이고 그대로 한 번씩 베껴 써 가는 숙제를 지겹게도 해댔다. 물론 '그렇게 했기 때문에 네가 지금 글장이로 먹고 사는 거다' 우기면 할 말 없다. 그러나 정말 자신있게 말하건데 나는 신문사설 몇 개 베껴썼다고 해서 글 솜씨가 크게 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신문사설이란 죄다 한자말 투성이다. 사실 학교에서는 신문사설에 나오는 한자를 열심히 베껴 쓰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던가. 제대로 된 글짓기 교육을 받지 못했던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한자말 투성이의 사설을 베껴 쓰고 그것이 논설의 모범 답안인양 가르쳤으니 그렇게 배운 수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글은 한자말 투성이의 글이라 생각할 수 밖에. 그래서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쓰는 글은 죄다 알아 먹기 어려운 한자말 투성이고 그렇게 써야만 대접받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사실 나는 언론에 별로 감정이 없지만 요즘 들어 계속 우리글을 바로 쓰는 법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언론이 우리 글을 망쳐 놓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자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핑계로 제목에는 뜻도 모를 한자말들이 넘쳐나고 전문가들이 쓴 글은 어려운 말 투성이다. 솔직히 누구나 읽으라고 펴낸 신문을 그렇게 어렵게 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연히 초등학교 논술에 대한 책을 한 권 접하게 되었는데, 현직 교사가 썼다는 이 책에서 말과 글이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아, 다행스럽게도 이제 우리 아이들은 한자말 가득한 신문사설을 모범 답안으로 여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어디 책 한 권 가지고 세상이 바뀌겠는가. 하지만 그 책을 읽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 말과 글을 살려야 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열심히 글을 쓰고, 그 글을 퍼뜨리고, 그 글을 읽기 시작하면 반드시 우리 말과 글은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내고, 계속 간직할 것이다. 별 힘도 없고, 아는 것도 많지 않은 내가 굳이 이런 글을 쓰는 건, 거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 FIN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05.01 10:1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난.. 감정 많은데.. ^^

  • Favicon of http://biog.empas.com/bouquetdor BlogIcon 진주애비 2007.05.03 20:4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가 선생님께 배웠다며
    이모티콘을 못 쓰게 하더라고요 블로그상의 답글을 남길때 무심코 사용했던 그 기호가
    얼마니 잘못된건지 새삼 느꼈습니다 가능하면 자제를 하는중입니다...^^;; <== 이것도 사실은....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5.03 20:53 신고 수정/삭제

      ^^ 이모티콘은 감정을 표현하는 일종의 상징 같은 건데 그런 건 좀 써도 되지 않을까요~ (하여튼 저도 글쓰기 어려워요~ ^^)

  • 김진환 2011.12.08 15:1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파랗다는 푸르다에서 파생된 단어이고 푸르다가 풀의 색을 가리키는 단어라면 파랗다는 녹색의 의미도 있는 듯 합니다.

회초리 같은 책, 우리 글 바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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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에 발행된 우리 글 바로 쓰기 1권

이오덕 선생님이 쓴 '우리 글 바로 쓰기'는 초판이 나온지 벌써 18년이 되었지만 읽을 때마다 반성하게 만드는 회초리 같은 책이다. 잘난 척 하느라 어려운 말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말과 글을 다 버려 놓았다고 호통치는 듯한 모습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쉽게 써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하면 될텐데, 굳이 어려운 한자어를 쓰고 그것도 모자라 한자어와 일본어를 조합해 기괴한 낱말들을 만들어 내는, 소위 말하는 '배운 사람들'한테 던지는  선생님의 충고는 호령하다 못해 애원하는 듯 가슴 아프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선생님에게 혼나는 대상은 세상 여론을 다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저 당당한 거대 신문사들이다. 그들이 얼마나 잘난 척 하기 위해 어려운 말을 쓰는지 지적하고 그 말들을 쉽게 풀어 썼을 때 얼마나 읽기 쉽고, 알기 쉬운지 알려준다. 신문사 뿐이랴. 가방 끈 길다고 하는 수많은 논문들, 잘난 척 하는데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정치인들도 혼나는 대상이다. 책 속에서 선생님이 그들의 잘난 척 하는 말투를 하나 하나 지적할 때 나는 은근한 쾌감 마저 느낀다.

말과 글은 살아 있어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면 따라 변하게 된다. 쓰던 말이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말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의사 소통이라는 원래 목적을 무시하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의 도구로 쓰이면서 사라지고 태어나서는 안된다. 말과 글이 이렇게 변질되면 우리도 손해다. 그 어려운 말과 글을 알아 듣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많이 배우고 생각도 많이 한다.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쓰는 어려운 한자들을 이렇게 쉽게 풀어쓸 수 있구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된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을 세 번 정도 읽었지만 아직도 바꿔 쓰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것인가. 글 쓰기를 좋아하고, 글 쓰기를 내 남은 인생의 일로 삼으려는 나에게, 우리 글 바로 쓰기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참고로 이 책은 총3권이 나왔다. 글 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하는 책. 나는 이 책을 대한민국 블로거들에게 권하고 싶다.  블로거들이 쓰는 글이 세상을 변화시키듯, 아름다운 우리 말과 글을 지킬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 FIN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04.14 16:3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그 거대 신문사에 몸 담았었으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구만... ^^
    형 한테도 좀 빌려주라.. ^^

  • Favicon of http://biog.empas.com/bouquetdor BlogIcon 진주애비 2007.04.17 20:5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꼭 사서 옆에 두고 싶은 책이네요
    블로그를 한답시고 글을 올릴때마다 맞춤법,띄어쓰기,적절한 단어 선택등등
    어려운게 하나 둘이 아니었거든요..혹 절판 된 건 아니겠죠...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4.17 23:06 신고 수정/삭제

      제가 알기루 3권까지 나왔는데 1권은 모르겠고 2,3권은 아직 팔고 있을 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cyworld.com/lawdol1004 BlogIcon 이상우 2007.05.23 11:09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이오덕 선생이 누군가?
    우리말 글쓰기의 신화적 존재이다.
    허구적 동심이 아닌 진심이 담긴 동심을 발굴해낸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지킴이였다.
    권정생 선생을 후원하고, 단순한 국수적인 우리말 사랑이 아닌, 참우리말 지킴이였다.
    아, 이오덕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5.23 13:34 신고 수정/삭제

      네, 제가 정말 존경하는 선생님입니다

  • Favicon of http://paranmin.net BlogIcon 유마 2007.05.23 11:5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도 글쓰기를 연습할 때 가장 먼저 찾아본 책이 이오덕 선생님의 책이었습니다.
    정말 반성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옆에 두고 끊임없이 봐야할 책!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5.23 13:34 신고 수정/삭제

      옆에 두구 내내 공부해도 항상 부끄럽더라구요 ^^

  • 수월 2007.05.23 19:29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한자어도 우리글입니다. 한글만이 우리글은 아닙니다.
    쉬운 순우리말을 발굴하고 널리 쓰려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한자어를 배척하는 시선은 아니어야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라 할 때 벌써 '존경'과 '선생'이라는 한자어가 들어갑니다.
    '책'이라는 단어도 한자어이지요. 역사적인 뿌리를 볼 때도 한자는 우리 민족이 만든 글입니다.
    한나라의 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은하수 '한'자이고 거기에서 한'일'자가 나오고
    한민족, 한글과 다 통하는 의미입니다.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5.23 21:30 신고 수정/삭제

      이 책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자어를 쓰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고운 우리 말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한자말로 쓰는 나쁜 버릇들을 고치자는 뜻입니다. 좋은 우리 말이 한자 말에 가려져서는 안된다는 얘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