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 여행객의 필수품, 에일

"절벽 아래에는, 여행객들이 가져가는 짐들이, 출발의 와중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고, 그것들은 다리로 사용하는 널빤지 덕분에 선박으로 신속하게 옮겨졌다. 비스킷 몇 포, 절인 대구 한 통, 휴대용 수프 한 상자, 식수 한 통, 맥아 한 통, 타르 한 통, 에일 너덧 병, 여러 가닥 가죽띠로 동여맨 커다란 여행 가방, 작은 여행 가방들, 고리짝들, 횃불을 밝히거나 신호를 보낼 때 쓸 삼 부스러기 한 뭉치 등, 그들의 짐은 그런 것들이었다.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은 그러나 저마다 여행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유랑 생활의 징표였다. "


-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이형식 옮김, 열린책들 중에서 


한 무리의 거지들이 밀항하려고 우르카에 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지들이라도 소지품이 없을 수 없겠지요. 이 글 다음 문장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끼니 수단을 내동댕이치지 않는 한…"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는 갖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 최소한의 도구에 맥아와 에일이 있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맥아는 보리를 싹 틔운 녀석으로 맥주나 위스키의 기본 원료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에일은 아무데서나 물을 마실 수 없었던 그 시절의 필수 음료수였을 겁니다. 게다가 때론 약으로도 썼을 테고요. 


에일(Ale)을 그냥 영국 흑맥주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에일에도 맑은 빛깔 맥주가 많이 있습니다. 에일은 맥주를 발효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정말 수도 없이 많은 맥주가 있습니다만 맥주를 무조건 둘로 나누라 하면 에일과 라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차이점은 발효할 때 어떤 효모를 썼느냐입니다. 


맥주를 발효시키는 미생물이 바로 효모인데요, 이 효모는 상면발효 효모와 하면발효 효모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하시겠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상면발효는 위쪽에서 발효한다는 뜻이고 반대로 하면발효는 아래쪽에서 발효한다는 뜻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 맥주 만드는 과정을 간단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보리를 물에 담가 싹을 띄워 맥아를 만듭니다. 이 맥아를 잘 말려 볶는데, 이때 얼마나 많이 볶느냐에 따라 맥주 색깔이 결정됩니다. 웃자는 얘기겠지만 기네스 맥주를 세운 아서 기네스가 맥아를 볶다가 졸아서(!) 좀 태웠는데 태운 맥아로 만든 맥주가 정말 맛있어서 계속 태웠다 어쨌다 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제 볶은 맥아를 갈아 물에 넣고 끓여 맥아즙을 만듭니다. 이 맥아즙에 효모를 넣고 발효시키면 알콜과 탄산이 생기면서 맥주가 되는 거지요. 잘 숙성시키고 깨끗하게 걸러내면 맥주 완성!(물론 간단히 써서 이 정도지, 이 과정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겠습니까 ^^)


다시 발효 과정으로 돌아갑니다. 맥아즙에 넣는 효모는 발효 온도에 따라 좀 높은 온도(16도 정도)에서 발효하는 효모가 있고 낮은 온도(10도 정도)에서 발효하는 효모가 있습니다. 높은 온도에서 발효하는 효모는 발효가 끝나면 맥주 위로 떠오르고, 낮은 온도에서 발효하는 효모는 가라앉는다는군요. 이 과정을 우리 말로 옮기려다 보니 상면발효, 하면발효 같은 괴상한(!) 용어를 쓸 수 밖에 없었나 봅니다. 


에일방식으로 만든 일본 부엉이표 맥주. 사무실에서 혼자!


상면발효 맥주는 탄산이 적은대신 묵직하고 부드러운 맛을 냅니다. 반면 하면발효 맥주는 탄산이 많고 시원하며 짜릿하지요. 상면발효 맥주를 에일이라 부르고 하면발효 맥주를 라거라고 합니다. 네, 우리나라 맥주에 붙은 라거는 상표가 아니라 맥주 제조 방식으로 구분한 명칭입니다. 


에일 맥주의 천국은 역시 영국이고요, 그래서 영국을 배경으로 한 웃는 남자에도 에일 얘기가 자연스레 등장하는 듯 싶습니다. 애당초 맥주는 사실 죄다 에일 방식이었을 겁니다. 라거 방식이 등장한 건 온도를 낮출 수 있는 냉장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거든요. / Fin



기네스가 맥주인 건 몰라도 책인 건 알지

1945년 기네스는 건축 엔지니어 출신이고 행정 전문가인
휴 비버 Hugh Beaver를 Manage Director로 영입한다.
기네스 역사에서 맥주를 만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이 경영자가 된 건 처음이라고.
그러나 비버는 시대를 정확히 꿰뚫어 볼 줄 알았던 사람.
앞으로 다가올 변화에 맞춰 회사를 개혁하고 중요한 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 금주법도 폐지되고, 때마춰 진행한 기네스 광고 덕분에
기네스 매출은 침체기를 딛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1951년, 휴 비버가 친구와 함께 사냥하러 나갔다.
사냥 도중에(아마도 새를 잡다가 무쟈게 놓친 모양이다)
어떤 새가 제일 빠른지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들 자기가 놓친 새가 제일 빨랐다고 주장했겠지.
휴 비버는 골든 플로버가 제일 빨랐다고 주장한 모양이다.
자기 주장을 뒷받침 하려고
온갖 자료를 찾아봤으나 답을 찾지 못한 휴 비버는
술집에서 사람들이 이런 문제로 잘 싸운다는 점에 생각해
누가 일등인지 결과를 모은 책을 만들어 술집에 갖다 두면
기네스 홍보에도 꽤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맥주 잘 팔아 먹으려고 만들었다는 얘기다).

사무실에 있는 기네스 북 밀레니엄 버전 ㅋ

누군가가 휴 비버의 생각을 구현할 만한 사람으로
노리스와 로스 맥훠터라는 쌍둥이 형제를 추천했다.
스포츠 전문 기자(원래 이 바닥에 있는 분들이 아는게 많지 ㅋ) 출신에다가
신기한 거라면 무조건 뛰어들 20대였던 형제는
곧바로 이 책을 만들기로 했고
1954년, 간단한 유인물 형태로
제일 첫 기네스 북이 태어났다.

그런데 대박!
유인물 수준이었던 기네스 북이 다음 해 베스트셀러 1등이 됐고
1956년엔 미국까지 가서 7천부 넘게 팔렸단다.

승승장구, 전 세계의 기록을 다루도록 성장한 기네스 북 덕에
기네스가 맥주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기네스 북이 뭔지는 다 알게 됐다.
기업이 책을 만들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바로 이거다.

기네스북 밀레니엄 버전에 실린 폴

잠깐 퀴즈 하나 낼까?
기네스 북 밀레니엄 버전엔 폴 매카트니가 있는데, 뭐 땀시 저기 올라가 있을까?
그것도 올라간 분야가... Internet 이라는.
퀴즈 2. 폴 매카트니 아저씨 뒤에 보이는 저 핫(!)한 언니는
왜 인터넷 분야에 올라가 있을까? ㅋ
하지만 지금 기네스 북을 만드는 곳은 기네스가 아니다.
1997년 기네스가 그랜드 메트로폴리탄과 합병해 디아이지오가 되면서
(우리나라에 양주 열나 많이 파는 그 디아이지오 맞다)
기네스 북은 자연스레 디아이지오로 넘어갔다.
2001년 디아이지오는 다시 기네스 북을 굴레인 엔터테인먼트에 팔고
2002년 굴레인 엔터테인먼트는 HIT 엔터테인먼트에 판다.

어쨌거나, 경영자가 심심풀이로 생각한 아이디어가
고객을 위한 서비스로 거듭나면서
대박을 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날 내 물건 좋다고 해 봐야 소용 없는 일.
물건보다는 물건에 담긴 콘텐츠와 문화를 팔아야
대박이 나는 법이다.

기네스, 참 배울 것 많은 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