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골프백의 먼지를 털며, 골프를 다시 생각하다

골프를 처음 친 건 한참 뜨거웠던 2000년 6월 어느 날이다. 사실 시작한 것도 좀 웃겼다. 골프 연습장 나간지 이십 일 만에 골프채도 없이 첫 라운드를 나갔고, 그 땡볕을 맞으며 뛰랴, 휘두르랴, 허둥대랴 했던 까닭에 나는 심한 열사병을 앓았다. 삼사일을 아팠을까 그러고 났더니 골프장에 두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 얘기만 해도 한 보따리 풀어낼 수는 있겠으나, 과거가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ㅜㅜ

몇 달이 지난 11월 어는 날, 사업 상 아는 양반이 전화를 했다. ‘골프 칠 줄 알아요?’라고 묻는데 자존심에 못 친다는 말은 안하고 ‘필드 한 번 나가 보긴 했지요’라고 대답했는데 이 양반, ‘됐어요, 3일 뒤, 레이크사이드에서 봅시다.’라며 전화를 딱 끊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끊고 나서 못 간다고 말을 해야 할텐데 그 넘의 자존심이 뭔지, 유통업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부랴 부랴 골프채를 하나 사고 퇴근하면서 바로 실내 연습장에 등록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삼 일, 칠 번 아이언을 몇 번 휘두르기만 한 채로 나는 레이크사이드에 갔다. 결과는 뻔하지 않나. 마침 동행한 사람이 업계 친구였길래 망정이지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큰일 날 뻔 했을 게다. 어쨌든 나한테 전화를 한 그 양반은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ㅜㅜ

그 뒤로 나는 골프를 시작했고, 동호회 활동도 했고, 정말 재미있게 3-4년 동안 골프를 쳤다. 원래 심각하거나 집요한 성격이 아니어서 골프장 가면 노는데 더 신경을 썼고 그늘집마다 시원한 맥주 마시기를 열심히 했더니 스코어는 항상 100대를 넘었다. 아무렴 어때, 즐거우면 됐지.

그러나 나이든 선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가끔은 내 놀자식 골프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열심히 집중하는데 혼자 흥얼거리고 대충 치고 놀면 안되는 거니까. 그래서 나름 스코어를 올리려고 집중도 해봤고, 선배의 조언에 따라 골프채도 한 번 바꿨고 그래서 태국 투어에선 96타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남쪽에서 친 건 인정 안해준다는 룰(!)에 걸려 결국 난 한 번도 백을 깨지 못했다.

스토리는 뻔하다. 그 뒤로 사업이 좀 어려워졌고, 골프를 칠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자연스레 골프는 내 손을 떠났다. 골프백은 한 구석에 먼지를 맞으며 서 있었고, 누군가 골프 얘기를 하면 나는 그저 ‘골프채가 뭔지도 까먹었어요’라면서 웃어 넘겼다.

벌써 2010년. 골프를 처음 시작할 때보다 나는 열 살을 더 먹었다. 솔직히 사는 형편도 좀 나아졌고, 이젠 슬슬 골프를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살도 좀 뺐고 운동도 하다 보니 옛날 즐겼던 골프의 매력이 슬슬 되살아났다고 해야 할까.


먼지 앉은 골프백을 열어 장비를 점검해 보니, 운동화나 장갑 같은 소모품은 다시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고, 서른 중반이라는 나이를 고려해 샀던 골프채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맞지 않았다. 결국, 먼지 앉은 골프백이 남아 있긴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하는 셈이다. 아, 선물 받은 드라이버는 여전히 쓸만할테니, 그 넘 하나 건졌다고 해야 할까.

이런 저런 정보를 찾다 보니, 요즘 이 녀석이 쏙 눈에 들어온다. 나이키 VR 아이언이다. 가격 대도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고, 여전히 백돌이인 내가 쓰기도에 괜찮아 보인다. 물론 나는 다시 연습장을 찾아 스윙 감을 찾아야 할테고, 몇 번의 시타도 해보아야겠지. 하지만, 백돌이가 시타한다고 뭐가 좀 달라질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처음 골프를 시작했던 이유와 나이 마흔을 넘기며 다시 골프를 시작하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하지만 이젠 뭔가 목표를 세우고 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건, 아무래도 세월의 연륜 때문일까. 다음 주엔 칠 번 아이언을 들고 실내 연습장을 타박 타박 찾아야 할 것 같다. /  FIN 
  • Favicon of http://no1salr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10.07.05 08:4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공부가 먼지..
    백돌이 진입도 하기 전에 찌그러져버린 제 자치기의 꿈..ㅠㅠ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7.05 09:26 신고 수정/삭제

      ㅎㅎ 슬슬 다시 시작하시게~ ^^
      같이 함 나가셔야지?

  • 넘버텐 2011.02.11 15:3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나이키 아이언 손맛 좋던데요?
    올해는 깨백장군으로 승승장구 하는 한해가 되시길...
    더불어 저랑도 라운드를 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