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13계단, 인간은 인간을 심판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요즘 들어 사방에서 추천해 주는 추리 소설을, 마치 늘어나는 몸무게 때문에 먹어서는 안될 달콤한 간식을 몰래 먹듯이 하나씩 빼 먹고 있는 레이. 역시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듯이, 책도 세계문학만 읽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ㅋ 이번에 선택한 책은 13계단. 나름대로 추리 소설 마니아인 우리 사무실의 토양양은, 13계단 읽을 거야, 했더니 오, 죽여요! 라고 강추했다는. 이 책을 처음 추천한 다희양토양양의 강추를 받았으니 기대감은 급상승! 이러다가 재미 없으믄 두 사람한테 책임을 떠 넘겨야지, 라는 못된 생각과 함께 읽어내리기 시작했으나…


처음엔 살짝 지루한 듯 싶다가 - 이건 정말 강력한 추천 때문에 급상승한 기대치의 책임일 듯 - 순식간에 빨려 들게 만드는   작품. 지난 번에 읽었던 천사의 나이프처럼 사법 제도의 모순과 그 안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을 적절히 풀어내면서 정말 놀라운 반전을 던져 준다. 책을 완전히 읽고 나서야 예상치 못한 결말에, 허탈함을 던질 지도 모를 일. 이렇게 극찬을 해 놓으면, 나 때문에 이 책을 읽을 분들은 또 기대감이 급상승 할 것인데, 그건 내 알바 아니라는 무책임한 발언과 함께 약간의 스토리를 풀어 놓겠다.

한 명의 사형수. 노부부를 잔인하게 살해한 죄로 사형을 언도 받고 집행 일을 기다리는 그는, 정작 자신이 살해한 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순간적인 기억 상실증으로 판단한 사법부는 그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가차 없는 사형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는, 아침마다 자신의 방 앞을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낸다.

한 명의 전과자. 본인의 의도와 상관 없이 누군가를 살해하게 된 청년. 사망자가 먼저 공격했고 피하는 과정에서 살인이 일어났음을 감안해 2년 형을 치르고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돌아와 보니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부모는 배상금을 물어주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는 한 올의 미안한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잘못이 아니므로.

한 명의 간수. 이제 막 퇴임을 앞둔 간수. 그에게 사형수의 무죄를 밝혀달라는 익명의 요청이 들어온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속죄를 하기 위해 기꺼이 일을 떠맡은 그는, 그가 평소 눈여겨 봤던 그 전과자 청년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부모의 재정난을 해결해야만 했던 전과자 청년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사건의 실마리는 사형수의 희미한 기억 하나, 바로 돌계단. 막연한 돌계단에 의지해 간수와 전과자 청년이 사형수의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과연 사형수는 정말 살인을 한 것일까. 왜 간수는 전과자 청년을 자신의 파트너로 결정한 것일까. 전과자 청년은 정말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이제 와서 사형수의 무죄를 밝히려는 인물은 또 누구일까.

사법 제도의 모순은 애당초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는 인간이 누군가를 심판하기 때문에 생겨난 어쩔 수 없는 것일 게다. 그러나 사회의 질서를 유지 하기 위해선 비록 모순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누구에게 판결을 내리고, 집행해야 한다. 이상적인 사법 제도는 이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막기 위해서라면 범죄자가 풀려나는 것을 개의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되고, 그에 대해선 아무런 댓가도 치러지지 않는다. 독자는, 작가와 함께 이런 갈등의 구조에 빠져 든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순에 결말을 낼 수 없지만 작가의 결말에 안도하며, 때론 아쉬워하며, 때론 씁스레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다카노 가즈아키는 영화, TV 등에서 극본을 쓰다가 2001년 13계단을 써서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은 없는 법이라, 그 동안 작가가 수 없는 내공을 쌓아왔겠지만, 첫 방으로 대박을 터뜨린 건에 대해서는 마냥 부럽기만 하다. 이 책에서 13계단은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건 책을 읽을 사람이 스스로 찾아 볼 일이라 굳이 여기서 말할 거리는 못되는 듯 싶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책이다. 이 작가의 다른 책인 유령 인명 구조대를 또 읽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13계단(밀리언셀러 클럽 29)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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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www.rabbicat.com BlogIcon 토양이 2009.04.21 09:0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타인을 단죄할 권리 같은 게, 과연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도 역시 합법적인 폭력일 텐데 말이에요. ㅎㅎ
    저는 요즘 블랙 달리아 읽는 재미에 푹~ ㅋ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4.21 12:10 신고 수정/삭제

      단죄할 권리는 없으나
      죄를 지은 사람은 어떻게든 댓가를 치러야 하고...

      여튼 어려운 일일세. ㅋㅋ
      블랙달리아는, 영화 제목 아니었든가?

  • ^^ 2009.04.21 10:52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전 이런 공포 스릴물은 영 땡기지가 않아서요 ㅠㅠ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4.21 12:09 신고 수정/삭제

      공포 스릴러 아니에용~ ㅋㅋㅋ

      우리 딸도 좋아라 하면서 두시간 만에 읽던데요??

  • Favicon of http://no1sal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09.04.21 12:3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어케 하믄 아이들에게 책을 좀 읽힐 수 있을까요..
    아..아범부터 읽어야겠구나..ㅡㅡ;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4.21 12:52 신고 수정/삭제

      부모가 책을 읽으면
      아이들은 따라 읽는 법이라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젠장, 부모가 책을 못 읽는 걸... ㅋㅋ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9.04.25 23:4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이번에 뉴질랜드갈 때 추리소설 두권가져가야지.. ^^

  • Favicon of http://www.kimdahee.com BlogIcon 다희 2009.04.26 20:49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천사의 나이프와 더불어 13계단도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뻐요.
    편집장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책장이 빨리 넘어가면서도
    생각할 여지를 던져주는 추리 소설을 찾기가 참 힘들다니...
    이 두권의 가치가 더 빛을 내는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다카노 가즈야키나 야쿠마루 가쿠나 처음 소설을 낸 게 란포상에 수상되다니 대단하죠?
    이번에 6시간 후에 너는 죽는다라고 다카노 가즈야키 단편선도 나왔는데 13계단 보다는 못한 것 같아요. ^-^

    PS | 저번주에 읽은 용의자 X의 헌신도 재밌었어요!

  • 그라프 제플린 2009.04.28 05:0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적어도 쥐를 심판할 권리는 있다고 (엉?)

  • qwr 2009.04.28 19:0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좋은 글 담아갑니다.

    혹시 저랑 책 바궈 읽지 않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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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afterdigital.tistory.com BlogIcon 조선얼짱 2009.04.29 10:5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제가 갖는 의문도 그 점이에요 ..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 ..

    법의 심판으로 인해
    누군가를 살해한게 되돌려진다거나
    바다에 쓰레기를 배출하여 오염을 시킨게 원상복구가 된다거나 ..
    하지를 않는다는것이죠.

    인간의 죄는 어떻게 다스려져야 하고 누군가가 심판을 하게 되는건가요 ..
    그렇다면 그런 과정들은 누가 치유를 해주고 되돌려 놓아 주나요?
    레이님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꾸벅~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4.29 11:10 신고 수정/삭제

      저는... 제가 심판하고 싶을 뿐이고...
      저는 심판 받기 싫을 뿐이고...

      지극히 이율배반적인 사람의 심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제가 뭐라 답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

      그런데 한 가지 아는 건... (뭐 다 아시겠지만)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인해 치유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물론 그 사람이 서로 동일한 사람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항상 사람이 그리운가 봅니다.
      모 광고처럼, 그래서 항상 사람을 향하는가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