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방법

아빠가 딸에게 가르쳐야 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15
비행기, 또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방법

- 항공사 카운터서 보딩 패스를 받아야 해. 요즘 같은 성수기엔 사람이 많으니까 좀 서둘러야 하고. 자, 아빠를 따라와.

항공사 카운터를 찾아 줄을 서고, 기다리고, 드디어 카운터 앞에 섰습니다. 짐을 올려주고 아이에게 말합니다.

- 언니한테 e티켓 주고, 이젠 니가 설명 들어.

아무리 중학생이라도 어린 여자애 혼자 가니까 직원이 이거 저거 좀 챙겨주는 분위깁니다. 아마 원하는 좌석을 물어보는 듯.

- 아빠, 자리는 창가, 복도 어디에 앉을까?
- 창가가 좋을 듯 하지만 아무래도 움직이기 편한데는 복도 쪽이 좋을 텐데. 이번엔 창가에 앉고 올 때는 복도 쪽에 앉으렴.

그렇게 짐을 붙이고, 티켓을 받고 출국장 입구에 섰습니다. 비행기가 처음은 아니지만, 혼자 외국 나가는 건 처음이니까 아무래도 걱정입니다. 아이도 다 아는 거지만 몇 번씩 설명합니다.

- 여기 나가면 가방 검사하는 데가 있고, 거기 지나면 아저씨가 박스에 앉아서 여권 보는 데가 있지?
- 아빠, 다 알어. 걱정 마세요. 나 들어갈테니.

아빠를 안심시키려는 듯, 딸 아이는 아빠를 한 번 안아주고는 씩씩하게 출국장으로 들어갑니다. 가끔 열리는 문 틈으로 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빼꼼 쳐다 봅니다. 가방을 검사대에 올려 놓고 소지품도 올려 놓고 아이가 게이트를 통과합니다. 어느 틈에 아이가 보이질 않습니다.

더 해 줄 것이 없는 줄 알면서도 출국장 문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아빠를 부르며 다시 나오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을 버리지 못합니다. 빼꼼 열린 문 틈을 아무리 들여 봐도 딸 아이의 노란 옷은 이제 흔적도 없습니다.

- 밥이나 먹자.

새벽 같이 집에서 나서느라  밥도 못 먹은 아내를 붙들고 식당으로 갑니다. 딸 아이도 밥을 먹여 보냈어야 했는데 출입국 심사대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어 먼저 들여보낸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아빠를 닮아 혼자 뭐 먹기 싫어하는 주변머리라서 틀림없이 그냥 버틸텐데, 이럴 땐 진짜 DNA가 원망스럽습니다.

공항 4층 식당에 앉으니 출국장 안쪽 면세점이 보입니다. 언제쯤 들어가려나 머리를 삐죽 내밀고 있는데 삐릭 문자가 옵니다. 아빠 나 면세점 있는데 왔어. 응? 벌써?

이렇게 빨리 들어갈 줄 알았으면 밥 먹여 보낼 걸. 다시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있습니까. 전화를 걸어 식당에서 보이는 게이트 쪽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십여분 지나 쫄래 쫄래 걷는 아이가 보입니다. 전화를 또 겁니다.

- 앞으로 조금 더 와. 거기 시계 파는 면세점 앞으로 말이야
- 아빠 어딨는데 내가 보여?
- ㅋㅋ 고개 들어봐. 더 위로, 위로~
- 아! ㅋㅋㅋ”

신나게 손을 흔드는 녀석과 수다를 떱니다. 심사는 잘 했냐, 머리는 안 아프냐, 게이트 번호 확인했냐, 가다가 뭐 먹는데 나오면 사 먹고 약 챙겨 먹어라

다 아는 잔소리를 또 한 번 하고는 비행기 탈 게이트 쪽으로 보냅니다. 몇 걸음 가던 아이가 고개를 돌리고 손을 흔듭니다. 어여 가라고 손짓을 하면 또 가다가 고개를 돌리고, 또, 또, 또... 그렇게 다섯 번을 돌아보고 나서야 녀석은 뒷 모습을 보입니다.

주문한 식사가 도착했고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데 괜히 울컥합니다. 겨우 5주 내보내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합니다. 아이는 외려 씩씩하게 잘 가는데 보내는 아빠 마음은 무엇이 그리 걱정이든지요.

San Francisco Airport (1999)
(사진 출처 : 플리커 Hunter-Desportes) 이 사진은 글과 관계 없습니다. ^^

한 시간 쯤 지나 아이는 이제 비행기 탄다고 문자를 보냅니다. 자기 없는 동안 아빠 울지 말라고 농담도 건넵니다. 그렇게 아이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제 열 세 시간 후에나 연락할 수 있겠지요. 그제서야 이것 저것 또 생각납니다.

입국신고서 쓰는 법 가르쳤어야 하는데... 로밍한 전화기 쓸 줄은 아는 걸까. 사용법 안내문 하나 넣어준 걸로 잘 할 수 있을까... 짐이 무거워서 누군가 도와줘야 할텐데... 면세점에서 저 좋아하는 초콜릿 사먹으라고 할 걸...

- 아우, 난 유학은 못 보내겠다...

마음 속 가득 쓸데없는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혼자말 하듯 툭 뱉은 말을 아내가 물고 늘어집니다.

- 어랏, 왜 마음이 바뀌셨으? 애는 내보내야 한담서? 이 땅에서 가르치기 싫담서?
- 아녀,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내가 가르칠 것이 많아. 난 아직 내가 아는 것의 십 분의 일도 못 가르쳤다고.
- 피~

하지만, 그건 핑계란 걸 아빠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빠는 딸에게 가르칠 것보다 딸을 통해 배울 것이 아직도 남았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눈 앞에 보이지 않도록 비가 쏟아집니다. 하필이면 이런 날 비가 오나, 괜히 투덜도 대 봅니다. 아마도 열 세 시간, 그리고 5주 기다리기가 힘들어 투덜댄 것이 틀림 없습니다. 아이는 자라는데 아빠는 아직도 아이를 놓을 줄 모르는가 봅니다/ FIN

  • Favicon of http://www.yamyong.com BlogIcon 얌용 2010.07.21 00:3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떠났군요~? 한동안 적적하시겠어요...

  • Favicon of http://no1salr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10.07.21 09:0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아..보내야만 하는 건가요..ㅠㅠ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7.21 11:42 신고 수정/삭제

      ^^ 그건 결국 부모의 선택인게지 ^^

      부모의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미
      잘 알고 계시잖는가? ㅋ

  • 2010.10.21 09:27 ADDR 수정/삭제 답글

    비밀댓글입니다

작은 비밀을 만들고 공유하는 법

아빠가 딸에게 가르쳐야 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14
작은 비밀을 만들고, 공유하는 법

고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그땐 탁구가 꽤 유행이어서,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던 저도  친구들과 탁구장 몇 번 갔었지요. 어느 주말이었을 텐데 탁구 치고 좀 느지막이 집에 왔는데 아버지께서 뭐하고 왔느냐고 물으시기에, 탁구 좀 쳤어요, 대답했었습니다. 제 딴에 아버지는 남자니까, 탁구 친 거 정도는 아셔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문제는 밤에 터졌습니다. 성적표를 보여 드려야 했는데 - 왜, 도장 찍어가야 하잖아요. ㅜㅜ - 성적이 좀 떨어졌던 거죠. 엄마한테 야단맞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한 말씀 하시더군요. “공부 안 하고 탁구나 치러 다니니 성적이 이 모양이지.” 아들이 운동하고 담쌓고 사는 걸 아는 엄마는 “얘가 무슨 탁구를 치러 다녀요.”라고 의아해하셨지요. 그때 아버지 말씀이 저한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다 알고 하는 소리야.”

그 뒤로 저는 아버지께 제 비밀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졌다는 뜻은 아닙니다(아이를 키워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 요즘은 아버지와 진짜 사이가 좋습니다). ^^ 하지만, 제 딴에는 아버지와 탁구라는 비밀 정도는 공유해도 되겠다고 싶어 말한 건데 그 비밀이 무기가 되어 돌아오니 많이 서운했던 겁니다. 어쩌면 아버진 이 일을 기억도 못하실 테지만, 제겐 잊을 수 없는 작은 상처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Bert and Ernie: Let me tell you a secret / 20090917.10D.53994.P1 / SML
비밀은 속닥이는 법이지요 ^^ (사진 출처 : Flickr에서 See-ming Lee 李思明 SML님)

그래서일까요. 저는 딸 아이가 제게 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학교 얘기, 친구 얘기, 용돈 얘기, 갖고 싶은 것들... 그런 저런 얘기들을 할 때면 저는 그냥 듣고, 조언할 것이 있으면 하고, 엄마 몰래 용돈도 주고, 가능하다면 필요한 것도 사주고 그럽니다. 아이 입장에선 엄마한테 할 얘기가 있고, 아빠한테 할 얘기가 있는 법이지요. 주로 엄마한테 말하기 곤란한 것들을 아빠에게 할 텐데(물론 반대 경우도 있겠지요 ^^) 그걸 아빠가 엄마한테 다 말하면 딸 아이가 아빠에게만 말한 의미가 사라지는 겁니다. 가끔 아내는 둘이서만 속닥댄다고 투덜대지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도 딸하고 비밀 만드셔. 물어보지 않을 테니까”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쁜 비밀을 공유해선 안 되겠지요. 하지만, 그저 소소한 비밀이라도 공유하면 상대가 훨씬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 비밀이 지켜진다는 걸 알면 또 얘기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겠지요. 딸 아이는 아빠한테 한 얘기는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까 아빠한테는 믿고 말해도 된다는 걸 아는 거지요.

아빠란 존재는 ‘딸 아이가 세상을 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볼 때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항상 내 뒤엔 아빠가 있어, 라고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거죠.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일을 겪게 마련이고, 때론 눈물도 흘려야 합니다. 때론 좌절하고, 넘어지겠지요. 그때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일으켜주고 다독거리는 역할은 친구나 애인이나, 다른 가족들이 할 겁니다. 아마도 그들이 아빠보다 훨씬 더 잘 할 테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기 어려운 비밀 때문에 힘들 수도 있겠지요. 아빠와 딸이 소소한 비밀을 만들고 지키는 연습을 해야 하는 건 바로 이런 때를 위해섭니다. ‘아빠는 비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라고 딸 아이가 믿으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아이는 반드시 뒤를 돌아볼 겁니다. 거기엔 내가 언제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아빠가 서 있다는 걸 딸 아이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 FIN
  • Favicon of http://me2day.net/cheimonas-/ BlogIcon cheimonas 2010.07.14 13:4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많은 부모님들께서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단 부모자식간이 아니라 남녀간에도 통용되는 말이로군요.

  • Favicon of http://no1salr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10.07.14 15:5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근디 이넘의 아들내미는 비밀로 하기로 해놓구 마님한테 몰래 꼰지르고..ㅡㅡ;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7.14 18:45 신고 수정/삭제

      그래서 아빠가 딸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들이라네. 아들들은 안 먹혀 ㅋㅋ

  • Favicon of http://blog.daum.net/bouquetdor BlogIcon 진주애비 2010.07.14 17:3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나이 먹어 좀 빌빌거리는 아빠를 위해 우리딸들이 아빠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그날을 위해
    오늘도 전,,,ㅋ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7.14 18:46 신고 수정/삭제

      하하 모든 아빠들의 꿈인가요 ㅋㅋㅋ

  • Favicon of http://pp19in.egloos.com BlogIcon 뽀다아빠 네모 2010.07.16 11:2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음! 그렇죠...아들은 제가 비밀 얘기를 하면...그걸 빌미삼아 엄마에게 일러바치고 지가 엄마의 신임을 얻습니다....저는 아내에게 혼나고....

    그뒤로 아들에게 제 비밀을 털어 놓지 않습니다만.....

    이 글을 읽으니....아들 비밀은 제가 지켜줘야 겠다는 생각이 확실히 드는 군요....

  • Favicon of http://brucemoon.net BlogIcon bruce 2010.12.23 09:2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비법을 하나 얻어가는 느낌인데요 ^^ 저도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