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낡은 지갑 이야기

내가 널 처음 만난 건, 참 살아가기 힘들다고 생각하던 그 해 여름이었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를 겪었고, 그 실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던, 혹은 내가 그들을 떠나던 그런 시절이었지. 그런 나를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던 그 누군가가 내게 널 선물했었어. 그저, 힘내라고 말이야. 그 사람은, 지갑만 주는 건 서운하다며, 일련 번호가 맞아 떨어지는 빳빳한 만원 권 두 장도 같이 넣어줬지. 그래야 지갑에 돈이 모이는 법이라면서.

그래서일까. 정들면 버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나였지만, 너에게만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했어. 그 땐 정말 힘들었었고, 그저 카드 몇 장이 너에게 담긴 전부였지만 왠지 나에겐 이런 지갑이 있다는 사실이 꽤 든든했었지. 이제 이 지갑을 채우면 될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일년, 이년, 삼년, 사년… 정말 정신 없이 살았어.

그 비 많이 오던 날 기억나니? 100미터도 안되는 길을 걸었을 뿐인데, 내 바지가 온통 젖어버릴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던 그 날. 엄청나게 내리는 비에 우산 챙기랴, 마트에서 산 물건 챙기랴. 바지 접으랴 정신 없는 와중에 난 그만 너를 떨어뜨리고 말았어. 사무실 빌딩 앞에 와서 출입카드를 꺼내려 할 때, 난 네가 사라진 걸 알게 됐지. 그 때의 그 당혹감이란. 네 안에 들어 있던 카드 몇 장이 내 삶을 유지하는 도구였는데 갑자기 그게 사라져버리니 어떡해야 할 지를 몰랐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트 앞에서 바지를 추스릴 때 너를 흘렸을 것 같더라. 그래서 우산을 쓰는 둥 마는 둥, 그저 다시 마트 앞으로 달려 갔어. 바지는 이미 젖은지 오래고, 이젠 상의도 거의 젖어버렸지만, 난 그런데 신경 쓸 틈이 없었지. 그저 그 근처 어딘가에 네가 떨어져 있기만을 바랄 뿐. 하지만, 넌 거기 있을 리 없었지. 가뜩이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방송에서 내 이름이 들리는 거 아니겠니. “지갑을 분실하신, 000 고객님은 안전요원 근무지로…” 그 땐 그 소리가 정말 꿈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어. 정신 없는 마음에 찾아간 안전요원 근무지에서 무사히 너를 돌려 받고, 고맙다고 두유 두 박스를 사주고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옥외주차장 입구에서 주웠다고 하던데,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돌아다니던 길에 떨어 뜨렸던 모양이야. 살짝 젖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 하며 말렸던지.

아찔했던 순간은 또 있었어. 어느 날 저녁에 누군가와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또 누군가를 만나러 택시를 타던 날이었지. 술이 좀 취하긴 했지만, 택시비를 주고 내린 건 틀림없이 기억하는데, 또 지갑이 사라진 걸 알게 된 거야. 술은 취했지, 사리 판단은 잘 안되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용케 카드사로 전화를 걸어 분실 신고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길 바닥에 털퍽 주저 앉아 카드 쓸 때마다 날라오는 문자 메시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어. 틀림없이 혀가 꼬였을 테지. 

“데가요, 디갑을 분시랬나봐요… 카드를 이러버려서 신고하려고요… 아니요 제가 좀 취해서…”

바닥에 주저 앉아 반 쯤 풀린 목소리로 카드 분실 신고를 하는 걸 지나가던 아주머니 두 분이 보더니, “어, 이 분 지갑인가 보다"라고 말하더라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 아마도 틀림없이 꼬인 혀로 이렇게 말았을 거야.

“네, 껌정색 루이 xxx 장지가빈데요, 울 딸 사지니 드러있고요, 카드… “

“네, 맞네요. 여기 있어요.”

벌떡 일어나서 얼마나 고맙다고 말했는지 몰라. 맨 정신이었다면 지갑에 들어 있는 돈이라도 드렸을 지도. 그저 정신 없는 와중에 고맙다고 말로만 때우고 말았었던 거지. 그렇게 너를 찾은 것에 안도하면서, 그 날 더 신나게 술을 마셨을 지도 몰라.

그 뿐이겠니. 멀리 출장 갔다가 식당에 놓고 나오는 바람에, 근처에 있는 후배에게 전화해서 찾아 달라고 했던 일, 틀림 없이 차에 있겠거니 했는데 차에도 없고, 결국은 옷장 속 재킷에 있는 걸 만 하루 뒤에 찾았던 일… 이런 저런 사소한 일들이 많았는데, 결국 넌 항상 내게로 돌아왔지.

세월이 흐르면서 너는 조금씩 낡았고, 실밥도 조금씩 튿어졌어. 다행스럽게도 너는 점점 뚱뚱해졌고, 나는 슬슬 예전의 어려움을 잊어갔지. 그래도 가끔 너를 보면서, 네가 처음 내 곁에 왔을 때를 생각하곤 해. 문득, 나 요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도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이젠 새 친구가 왔어. 너하고 같은 출신이고, 너한테 정이 많이 들어서 그런지 다른 집 출신 애들은 영 맘에 들지 않더구나. 너에게서 한 장씩 카드를 꺼내 새 친구에게 넣을 땐, 참 묘한 마음이 들더라. 물론 너와 함께 선물 받았던 빳빳한 만원 짜리 두 장도 이사를 했지. 새 친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말이야.

나와 함께 많이 고생했어. 하지만 날 널 버리진 않을 거야. 새 친구에게서 뺀 스폰지를 채워 넣고, 새 친구가 나온 박스 안에 널 넣을 거야.  튿어진 실밥도 고쳐줄께. 그 곳에서 편안히 쉬고 있으렴. 어느 날 내가 문득 너를 열어 보고, 너의 낡은 흔적들을 어루만지면서  지나간 내 시절들을 돌이키며 열심히 살고 있을 그 날을 감사할 때가 반드시 있을 테니까. / Fin

  • 피버 2009.10.01 00:3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잠깐 주위를 둘러보면서 '내게도 가슴찡한 사연이 있는 물건이 있을까' 찾아봤더랬습니다. 누구에겐 사소하지만 나에겐 역사가 되어있는 어떤 물건들이 나를 위로해주고, 다독여주고, 일으켜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소중한 지갑이 꼭꼭 주인을 찾아오는 걸 보면서, 레이님 지갑이 주인을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사람 또 날두고 어딜간게야?"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10.01 09:10 신고 수정/삭제

      "이 사람 또 날두고 어딜간게야?"

      이 문장을 읽다 보니, 갑자기 아무 생각없이 내버렸던(!)
      물건들이 마구 떠오르는 걸요!

      멋진 댓글 고맙습니다. ^^

  • Favicon of http://no1sal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09.10.01 09:1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드뎌 사물과 대화를..(ㅡㅡ)b
    추석 지나믄 저랑도 좀 대화를..굽신..^^

    추석 잘 보내시구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10.01 09:11 신고 수정/삭제

      어여 오시게.

      사무실에 맛난 술 잔뜩 쟁여 놓고 있으니! ^^

      (난 요즘 진에 필이 꽂혀서리! ㅋ)

  • Favicon of http://blog.daum.net/bouquetdor BlogIcon 풍류대장 2009.10.01 19:32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잔 기울이며 그 아팠던 이야길 들려 달라면
    들려주실지...제 예감에 금번 추석을 레이님께선
    무척 잘 보내실것 같아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10.01 21:02 신고 수정/삭제

      흐음, 저야 뭐 항상~~

      추석 끝나고 아빠 번개 한 번 하시죠? ㅋㅋ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9.10.07 15:5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참.. 신퉁방퉁한 지갑이구만..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니 말여..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