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로주점, 막내둥이의 술 카시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주인공 제르베즈에게 함석공 쿠포가 대시합니다. 첫 남자에게 버림받은 제르베즈는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으리라 마음 먹지만 순하고 착한 쿠포에게 마음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막내둥이 카시스라고 불리나요, 쿠포씨?"

"아! 그건 동료들이 강제로날 술집에 데려가면 내가 보통 카시스 주만 마시기 때문에 붙인 별명입니다…"


에밀 졸라, 목로주점(상), 유기환 옮김, 열린책들


카시스는 영어로는 블랙커런트, 우리말로는 까치밥나무라고 부르는 식물의 열매랍니다. 베리 종류라고 이해하시면 쉽겠네요. 실제로 술맛도 교회 성찬식에서 쓰는 아주 달달한 포도주나 고창에서 직접 담았다는 복분자주와 비슷합니다. 꽤 달다는 것이 특징이고요. 그래서 약간 걸쭉한 느낌도 듭니다. 


술이 꽤 달아서 샷으로 마시기 보다는 칵테일에 많이 씁니다. 섹스온더비치(이름은 참~ ^^), 핑크레이디 같은 칵테일이 카시스를 재료로 쓴 대표적인 칵테일이지요. 이미 드셔본 분들 많겠지만, 카시스가 들어간 칵테일은 대부분 아주 달콤한 맛입니다. 그러나 카시스도 알콜도수가 15도나 되는 엄연한 술입니다. 단 맛에 홀짝 홀짝 들이키다가는 어느 순간에 확 취할 수도 있습니다. 




쿠포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술 마시다 죽은 까닭에 술을 혐오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동료들을 따라 술집에 갈 땐 카시스 정도는 마셔줄 정도로 꽉 막힌 사람도 아닙니다. 거기에 막내둥이라는 애칭을 고려하면 동료들이 쿠포를 꽤 좋아했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독한 술을 못 마시는 사람, 하면 우리는 대개 순진한 사람을 떠올립니다(그렇다고 독한 술을 마시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다ㅏ ㅜㅜ). 쿠포는 순진하면서도 제르베즈와 결혼을 반대하는 누이에게 맞설 정도로 고집도 있는 사람이지요. 어쩌면 그 사랑이 참으로 순수하게 시작했기 때문일 겁니다. 


카시스와 쿠포. 소설을 읽다 보면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란 생각이 듭니다. 작가도 그 점을 알고 쿠포의 별명을 막내둥이 카시스로 지었겠지요(라고 또 우겨봅니다 ^^). 하지만 쿠포는 인생에 누구나 한 번쯤은 다가오는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카시스 대신 독주를 마시면서 점차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위기가 닥칠 때 술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술처럼 좋은 약도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마시느냐,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술은 독이 되고 약이 됩니다. 어떻게 마시느냐에는, 누구랑 마시느냐도 포함됩니다. 언제든 연락해서 뭉칠 수 있는 좋은 술 친구 하나 정도는, 마치 비상금처럼 꼭 꿍쳐둬야 하는 법입니다. ^^ / Fin

이연실의 목로주점 vs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저는 목로주점이 뭔지 잘 모르는 세대입니다. 제가 아는 목로주점은 '흙바람 벽에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는' 아주 로맨틱한 목로주점 뿐입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처음 만났을 땐 무척 로맨틱한 이야기일거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왠걸, 제가 생각했던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참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그때는 왜 이 책 제목을 목로주점으로 번역했을까 같은 고민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전 대학 다닐 땐 술을 거의 안 마셨거든요. 아마 대학 내내 마신 술이 소주 한 병, 맥주 두 병 정도 될 겁니다. 술에 관심도 없으니 주점을 뭐라 번역한들 저하고는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흔이 넘고, 술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지금 다시 목로주점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목로주점이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전을 찾아보니 '목로'라는 게 '널빤지로 만든 좁고 긴 상' 이랍니다. 이런게 있는 술집이 목로주점이고요. 그래서 아, 이게 나름 바(Bar) 같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제 상상력이 부족해선지 저는 도저히 목로주점이 어떤 술집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목로주점 이미지를 찾아봤지만 그 어느 사진도 오리지널 목로주점을 보여주진 않았습니다. 


그나마 찾은 정보를 정리하면 목로주점이란 구한말에 등장한 서민 술집이랍니다. 허름한 술집 안에는 널빤지 상이 하나 있고 그 위에는 안주거리가 올라가 있다는 거지요. 술을 시켜서 이 안주와 함께 마시는 집이었는데 안주는 기본으로 제공하고 술값만 내면 됐다는 겁니다. 대신 의자가 없이 서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선술집(서서 먹는 술집)으로 슬슬 이름이 바뀌지 않았을까, 그런 추측을 해봅니다. 


여기까지 뒤지다 보니 어라, 내가 뭔 뻘짓을 하는 거지? 번역이야 무엇이든 원 제목인 L’Assommoir 가 뭔지 찾아보면 되는 거잖아? 하는 생각을 했더랍니다. 이젠 다 까먹은 프랑스어 지식을 동원해 찾아낸 게 바로 이 그림입니다. 1900년대 파리 술집 풍경이라네요. 



돈 없고 가난한 서민들이 앉아서 오래동안 마실 수는 없고 그저 서서 그날 하루의 시름을 달래는 곳. 그런게 L’Assommoir였는가 봅니다. 여기까지 만족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자해설에 딱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목로주점을 뜻하는 프랑스어 Assommoir는 원래 보통 명사로서 짐승을 도살하는 데 사용되는 도살용 몽둥이라는 뜻과 불순한 술을 파는 술집 또는 술집 주인이라는 뜻을 지닌다."


목로주점(하) 역자해설 중에서, 유기환, 열린책들

 

아하, 그렇지. 이런 뉘앙스가 있는 술집이 이 소설의 배경이 되어야지.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는 목로주점은 절대 이 소설의 배경이 아닌게야. 하지만 왜 목로주점이라고 번역했을까요. 선술집, 대포집 등의 어감보다는 목로주점의 어감이 훨씬 '문학답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콜롱브 영감의 목로주점에 있는 기다란 카운터를 목로라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여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목의 어감을 이해하고 나니 목로주점에 몰입하기가 좀 더 쉬웠습니다(라고 우겨봅니다. ^^ 안 그러면 목로주점을 찾아 헤맨 시간들이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자, 그럼 콜롱브 영감의 목로주점에선 무슨 술을 팔았을까요? 


"콜롱브 영감의 <목로주점>은 푸아소니에 가와 로슈슈아르 대로가 만나는 길모퉁이에 있었다. 간판에는 끝에서 끝까지 푸른 글자로 기다랗게 쓰인 하나의 낱말, <증류주 Distillation>라는 하나의 낱말만이 보였다."


목로주점(하), 에밀 졸라, 유기환 옮김, 열린책들


네, 증류주를 팔았겠네요. 게다가 이 주점에는 증류기도 있었습니다. 가히 악마의 부엌이라고 부를만할 증류기가요. 콜롱브 영감이 어떤 술을 증류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아마 과일 술을 주로 증류했을 겁니다. 포도로 만든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가 제일 많았을 것 같네요. 실제로 영어판에는 브랜디라는 표현이 중간 중간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마시는 이런 고급 브랜디는 아니었을 겁니다. 싸구려 와인을 증류해 만든 싸구려 브랜디로 도수도 일정하지 않고 맛도 거칠었겠지요. 하지만, 고단한 서민이 잠시 자기 삶을 잊고 영혼을 내려 놓을 수 있기엔 충분했습니다. 내려놓은 영혼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목로주점은 꽤 훌륭한 안식처였겠지요. 그러나 결국 자제하지 못하고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목로주점은 이 불행한 비극의 제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연실의 목로주점과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 겹치면서, 저는 목로주점의 정체성을 혼돈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로주점의 이미지는 여전히 이연실에 남겨두렵니다. 술이란 약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 마시면 언제든 약이 되는 법이라는 걸 전 알고 있으니까요. / Fin

  • BlogIcon 서미 2013.08.25 15:0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좋은 글 고맙습니다.
    목로주점 읽어봐야겠어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3.08.26 00:10 신고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읽은 걸 후회하진 않으실 거에요 ^^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몹시 목이 말랐던 제르베즈는 포도주를 몇 방울 떨어뜨린 물을 여러 잔 마셨다."


목로주점(상), 에밀 졸라, 유기환 옮김, 열린책들 


책 제목처럼, 졸라의 목로주점에는 술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러나 목로주점의 술은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술이 아니라 인생을 망치는 술입니다. 어디 목로주점 뿐이겠습니까. 문학에 등장하는 술은 대부분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천사보다 악마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목로주점과 술 이야기는 나중에 통으로 묶어서 해보고, 오늘은 아주 가벼운 구절 하나만 챙겨 봅니다.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도망간 랑티에 때문에 다시는 남자 따위와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제르베즈지만 쿠포의 끊임없는 구애에 결국 마음을 허락하고 쿠포와 결혼까지 합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피로연장인 '은 풍차' 식당에서 목이 말랐던 제르베즈는 포도주를 몇 방울 떨어뜨린 물을 마시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제르베즈는 술을 역겨워했고 쳐다보기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인 쿠포 역시 독주는 딱 질색이었지요. 


이 부분을 보고 역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여자)는 없고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요즘은 열 번 찍다간 스토킹으로 고발 당합니다. ^^ (뭔 쓸데없는 소리를 ㅜㅜ) 


아,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술과 물입니다. 우리는 흔히 술에 물타는 행위를 거의 범죄처럼 취급합니다. 물론 술 양을 늘리려고 물을 타는 진짜 범죄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술에 물을 타는 행위는 사실 술을 만드는 회사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들까지 흔히 하는 행동입니다. 


술 만드는 회사가 술에 물을 타다니! 분노하시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가장 흔히 마시는 소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참xx, 처음00 같은 소주는 고구마, 보리 등등 여러 곡식들을 발효하고 증류해서 90도 가량의 소주 원액을 만들고(이걸 주정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물과 감미료를 타서 제품 별로 16 ~ 25도 사이의 도수를 맞춰 출시합니다. 그래서 '희석식 소주'라고 부르는 거지요.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증류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의 솜씨가 있는 전문가라 해도 해마다 품질이 다른 포도나 곡물로 해마다 다른 날씨에서 해마다 다른 통에 술을 담그는데 그 도수를 똑같이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나오는 술은 도수가 언제나 똑같지요? 이건 물이나 도수가 다른 같은 술을 섞어서 도수를 맞추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심지어 맥주도 물을 섞어 도수를 맞추고 맛을 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술 제조회사 마다 달라 자기들의 비법이 되는 셈이지요. 


게다가 술에 물을 타면 좋은 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독한 술을 부드럽게 마실 수 있습니다. 물론 술의 제맛을 즐기려면 스트레이트가 제격이겠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독한 술을 즐겨 마실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게다가 술에 물을 타면 독한 맛 뿐 아니라 향까지 부드러워집니다. 위스키나 브랜디의 향이 와인 못지 않게 얼마나 우아하고 화려한지 물을 타서 향을 맡아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술 회사가 자기네 위스키를 맛있게 즐기라고 소개한 미즈와리 칵테일


그래서 칵테일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물과 위스키를 2:1 정도로 섞은 '미즈와리'라는 칵테일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비율이 위스키의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비율이라도고 하지요.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기 힘든 분들은 이 방법을 써보는 것도 좋습니다. 스카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도 어쩔 수 없이(!) 스카치를 마시는 날엔 이렇게 마십니다. ^^ 


뭐,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항아리에 물을 부어 포도주를 만드셨다는데… 아마 항아리에 남아 있는 와인에 물을 더 부어서 맛을 내신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봅니다(흐음, 설마 이런 걸로 신성모독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ㅜㅜ). 그저 웃자는 얘기입니다. 


술과 물. 좋은 의도로 잘 섞으면 술을 마시는 좋은 방법입니다. ^^ / Fin


PS> 참고로 제목으로 삼은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은 틀린 말입니다. 원래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