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서도 내내 아쉬운 '무방비도시'

나는 정해 놓고 영화를 본다거나, 꼬박 꼬박 극장엘 가야 한다거나 그런 타입이 아니다. 누가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면 그러지 뭐 하고 따라나서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어떤 날은 정말 미치도록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꽤 오래 전부터 이런 날이면 꼭 두 가지 징크스가 생겼다. 극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는 것이 그 하나고,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한국 영화를 골라 보면 꼭 피박을 쓴다는 것이 또 다른 하나다.

어제가 그랬다. 바쁜 일들을 한숨 죽이고, 숨 고르기를 할 만한 여유가 생겼던 날 저녁, 나는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잘 가는 영화관 사이트를 뒤졌다. 그런데 왠걸. 내가 좋아하는 부시고 싸우는 류의 영화는 하나도 없고 공포물이나 멜로물이니 뭐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물론 에어리언 어쩌구 저쩌구도 있긴 했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있는데 그런 건 이제 안 당길 때도 되지 않았던가.

정보도 없고, 막연히 영화는 보고 싶고.... 이럴 때 사람들은 대개 어떤 기준으로 영화를 고를까?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긴 하겠지만 나는 배우를 보고 영화를 고른다. 웨슬리 스나입스, 윌 스미스, 댄젤 워싱턴, 모건 프리먼(어쩌다 보니 죄다 흑인이네 ^^), 니콜라스 케이지, 로빈 윌리엄스 정도의 배우가 나온다면 나는 별로 따지지 않고 그 영화를 보는 편이다. 그리고 한 때는 신라의 달밤을 봤고, 가문의 영광을 봤다. 그래 믿거나 말거나, 나도 한 때는 김혜수가 좋았고, 김정은이 좋았다. 아주 잠깐 손예진도 이뻐했다. 배용준과 함께 나온 외출을 본 이후로(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 영화를 봤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손예진은 떠나 보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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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징크스에 빠져 헤메다가 결국 고른 것이 바로 손예진이 나온다는 무방비도시다. 솔직히 예고편 같은 것도 본 적 없고 사전 정보도 전혀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좀 해봤더니 평이 뭐 그만 그만이다. 선택의 여지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우울한 멜로 같은 건 아니라는데 희망을 걸고 그냥 이걸 보기로 했다.

다이하드를 본 이후에 생긴 버릇일까. 영화 시작하고 몇 분 안에 폭발이 터질까, 나는 참 유심히 보는 편인데 - 그리고 요즘 영화들은 폭발이든 사고든 꼭 영화 시작하자 마자 바로 때리고 들어가는 편이다 - 오, 영화 시작하자마자 차들이 서로 들이 박고 난리가 났다. 야구 모자를 쓰고 야구 배트를 든 일행이(이들이 경찰이었다니) 중간에 끼인 차로 달려들어 차를 부수고 난투극을 벌인다. 오, 액션 씬 볼만했다. 그리고 그 뒤로 간간 나오는 김명민의 액션 씬... 괜찮았다. 적어도 그 순간 만은 화면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대로 손예진이 소매치기 회사의 사장이고 김명민은 소매치기 집단을 잡으려는 경찰이다. 둘 사이에 당연히 썸씽이 있고, 묘한 인연의 끈을 뒤로 한채 결국 둘은 갈라서게 된다. 갈라서는 방법도 참 여러가지긴 하다.

액션 씬에는 집중할 수 있었지만, 소매치기 여두목으로 나온 손예진을 볼 때마다, 나는 자꾸 타짜의 김혜수가 떠오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저런 건 김혜수가 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외출에서도 그랬듯이 손예진은 아직 능숙한 연기를 펼치기엔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일부러 꾸민 듯한, 자연스럽지 못한 거만함, 도도함 그리고 앙칼진 모습들. 아마도 손예진이 대여섯살쯤 더 먹었다면, 그녀에게서 클래식의 이미지를 지워버릴 수 있을 때가 된다면 아마 좀 달리진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카리스마 있는 여두목이 혼자서 적에게 당할 때면 여지 없이 연약한 여자로 돌변하는 모습도 영 어색했다. 거기에 시체 하나 처리한 걸로 맞먹자고 덤비는 칼잡이 보디가드도 맘에 안 든다. 영화 끝에 보면 둘 사이의 관계가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닐진데, 어쩌자고 그 넘은 시체 하나 처리해 준걸로 맞먹으려고 덤비는 걸까.

주제넘게 평을 한 번 한다면, 누차 강조한 액션 씬은 좋은 점수를 줄만하고 김명민의 캐릭터도 그다지 어수선하지 않으나 손예진의 카리스마는 영화 전체를 끌고 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안방극장에서 순하디 순한 며느리 역할을 전담하는 김해숙 여사가 소매치지 짱 만옥이모로 돌변한 모습에서는 역시 중견 연기자의 저력에 감탄해야 했지만 만옥 이모가  또다시 소매치기를 하게 되는 동기도 별로 와닿지 않았다. 중간 중간 나타나는 내용을 어색하게 만드는 이런 설정들 때문에 순간 순간 스크린에 집중하면서도 내내 아쉬워 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손예진 대역 이름이 한 명 나온다. 그런데 어느 장면에서 대역을 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역을 쓸 만한 장면을 나는 떠올리지 못했다. 직접적인 액션 씬도 없었고, 베드 씬 - 그것도 베드 씬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젠장 - 에서의 대역은 더 말도 안된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드는 의문. 그래서 보란 말이냐 보지 말란 말이냐. 어차피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가 줄 수는 없는 거겠지만, 그래서 결국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듯 하다. '꼭 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어요...' ^^ / FIN

  • Favicon of http://mepay.co.kr BlogIcon mepay 2008.01.18 16:0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보지말라는게 아닌겐 아니라는 거군요..

  • Favicon of http://philomedia.tistory.com BlogIcon 필로스 2008.01.18 19:5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손예진에 낚였네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20 01:04 신고 수정/삭제

      정확히 말하면 손예진에 낚였다기 보다는... 극장에 낚였다고 해야 할까요. ㅋ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8.01.19 00:3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음.. 영화를 캐스팅면에서 분석하셨군요.. ^^
    캐스팅도 참 중요하죠.. 예전에는 감독 입맛에 따라했지만, 이제는 타겟을 분석해서 철저하게 사전 조사를 한 후 캐스팅 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외출 손예진 캐스팅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손예진이 캐스팅되는 순간, 제작사 사장과 같이 우동집에서 우동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캐스팅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고 갑자기 물어보더군요. 손예진이 나아요... 임*정이가 나아요.. 음.. 솔직히 당시에는 영화적인 판단을 할 시긴이 없었습니다. 시나리오도 아니 그 흔한 시놉시스도 모르는 상황. 오직 남자배우는 배용준이다... 아주 짧은 고민 긑에 손예진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캐스트 담당자와 전화하던 그분은...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손예진이래.." 오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영화에 그녀가 캐스팅되었다.. 정말이지.. 믿거나 말거나... ㅜ.ㅜ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20 01:05 신고 수정/삭제

      임*정이가 누군지 무척 궁금하다는... 왜 임창정이 떠오르는 거죠? ㅋㅋ

    • Favicon of http://www.rabbicat.kr BlogIcon 토양이 2008.01.20 01:55 신고 수정/삭제

      임창정 ㅋㅋㅋㅋㅋㅋ 웃음이 절로 나오는 =)
      임수정이겠죠? ㅋㅋㅋㅋ

  • Favicon of http://www.rabbicat.kr BlogIcon 토양이 2008.01.19 01:1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김명민 버닝녀임에도 불구하고 보지 않은 영화라지요. ㅋㅋ
    그나저나 에어리언 어쩌구는 안 보시길 잘 하신 거예요. 처절할 정도의 혹평 일색이더라구요. - -;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20 01:05 신고 수정/삭제

      미스트인가 먼가도 혹평 일색이더만... 정말 볼게 없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