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를 들으며 드라이피니시d를 마시다

소나기는 피해가는 법, 이란 말을 요즘 들어서야 실감합니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땐 소나기 정도 맞는다고 인생 꿀꿀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소나기를 만나면 잠시 피하면 될 걸, 그땐 왜 그렇게 비를 다 맞고 다녔던지 - 심지어는 우산 살 생각도 못하고 -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주말, 모처럼 마트에서 쇼핑하고 집 앞에 차를 주차했는데 조금씩 내리던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 겁니다. 예전 같으면 그저 비 좀 맞고 집까지 뛰어가고 말았을 것을, 좀 불편해도 우산 하나 챙겨 들고 가면 그럭 저럭 갈 것을, 왠지 차에서 내리기가 싫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소나기는 지나가는 법, 그저 좀 있다가 내리지 뭐.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후두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괜스레 여유를 떨어보려는데, 문득 뒷좌석에 실린 하이트 드라이피니시d 가 보입니다. 새로 나왔다던, 그래서 꼭 한번 마셔보고 싶었던 맥주여서 냉큼 집어들었던 거죠. 저거 하나 딸까? 


병을 하나 집어들고 뚜껑을 따려는데, 어, 이게 안 열립니다. 아, 병따개 있어야 하는구나, 난감해하는데 갑자기 제 가방에 있는 맥가이버 칼이 생각났습니다. 역시 남자는 주머니칼 하나 정도는 항상 들고 다녀야 하는 법입니다. 

드라이피니시d를 따고, 빗소리를 듣는데 살짝 서운합니다. 그래, 음악이 빠지면 되나. 미조구치 하지메의 첼로 정도면 아주 잘 어울리겠다 싶었습니다. 갤럭시S를 뒤져 미조구치 하지메가 연주한 셸부르의 우산을 찾아 볼륨을 한껏 올렸습니다. 

묵직하면서도 짜릿한 첼로와 불규칙하면서도 정감있는 빗소리, 거기에 날카로우면서도 깔끔한 드라이피니시d. 그저 편안했습니다. 아마 비가 더 많이 왔더라면, 음악이 좀 더 길었더라면 두 번째 드라이피니시d를 열었을지도 모릅니다. 

셸부르의 우산이 끝날 무렵, 빗줄기도 살짝 가늘어졌고 330ml 드라이피니시d도 어느덧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따라 올라올 줄 알았던 남편이 아직도 안 올라오니 이상해서 우산을 들고 내려온 아내가 빈 맥주병을 보고는 피식 웃습니다. 

됐어, 됐어. 이건 혼자 즐기는 거라고. 

냉큼 따라 타려는 아내를 말리고 짐을 들고 현관으로 뜁니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고 음악도 여운이 남았고 드라이피니시d의 기분좋은 쌉싸름함도 아직 혀 끝에 남습니다. 

이런 게 사람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맥주를 차 안에 실어놓을까 했지만, 원래 행복이란 의도해서는 안 오는 법입니다. 우연히 만난 소나기와 첼로와 드라이피니시d. 행복한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 FIN


흐린 날, 첼로가 마음을 적신다

창 넓은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하늘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엔 왠지 활기차게, 가슴 잔잔히 적시는 흐린 날엔 왠지 여유 있게, 세상을 적시는 비 내리는 날엔 차분하게 기분이 맞춰진다. 그 창이 동쪽을 향해 있다면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부터 기분을 조절할 수 있어, 더 행복하다.

하지메 미조구치의 Yours; Tears. 난 사실 잘 모르는 첼리스트였는데 - 첼로라고 하면 요요마 정도나 알 뿐! - 멜론 클래식 부문 차트에 랭크된 걸 보고 한 곡 듣다가 다른 곡도 모두 다운 받아 버렸다. 마침 다운 받은 날이 흐린 날이어서 그랬을까. 잔잔하게 울리는 첼로 소리에 그만 눈물이 날 뻔 했다.


Yours; Tears 앨범에는 모두 열 세 곡이 들어 있다. 전통 클래식이 아닌 우리가 흔히 들었던 팝이나 OST의 유명한 곡들을 첼로로 연주한 것이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여서 그럴까. 느릿 느릿 하면서도 묵직한 첼로의 음색이 말할 수 없이 풍부하게 가슴을 파고 든다. 앨범의 첫 곡은 Yesterday Once More로 시작하고 마지막 곡은 She로 끝난다. She라니! 그 얼마나 오랫 동안 아껴 아껴 듣던 멜로디인가.  

맑은 날에 듣는다 해도 음악이 어디 가겠는가. 또 음악이란 환경에 따라 기분에 따라 들리는 감성이 다른 법일게다. 그러나 맑은 날엔, 맑은 날 대로 들어야 할 음악이 따로 있으니 Yours; Tears는 흐린 날 용으로 아껴둬야 겠다. 오늘처럼 잔잔하게 흐린 날 소중하게 보관했던 LP 앨범을 꺼내듯, 아이튠즈를 열고 플레이를 누른다. 내 맥북에 연결된 하몬카돈의 사운드 스틱이 이런 날일 수록 더 고맙다.

오늘도 난 창 옆에서 광합성을 한다. 오늘 같은 흐린 날에도 나를 넉넉하게 해 줄 영양소는 충분하다. 하지메 미조구치의 첼로는, 넉넉한 영양소와 함께 나를 충분히 적셔줄 물 같은 존재다. 그래, 흐린 날이라고 마냥 흐릴 수는 없는 일. 흐린 날은 흐린 날 대로 즐기는 방법이 다 있는 법이다. 어차피 언젠가 해는 또 떠오르니까.

  • ^^ 2009.06.02 14:1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첼로를 배우려다 큰 악기를 주체할 수 없어 포기했던.... 지금이라도 첼로 배워 볼까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6.03 10:55 신고 수정/삭제

      하하, 어차피 배움에 있어 늦었다는 건 없을 듯.
      지르세요! ㅋㅋ

  •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angsdiary BlogIcon Hyang's 2009.06.07 21:2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미조구치 하지메 공연 블로그에서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