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바로 잡기 - 불구하다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 쓰기를 읽다 보면 우리가 멋내기 위해서 쓰는 한자말도 많지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쓰는 한자말이 얼마나 많은지 깜짝 깜짝 놀라게 된다.  그렇게 쓰인 한자말들은 우리 말과 글을 더 어렵게 만들었고 이제는 관용구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쓰이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가장 흔한 예가 이제 소개할 한자말, '-에도 불구하고'이다.

새삼 신문을 뒤적거릴 필요도 없이 정말 이 말은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심지어 국어 사전에도 아예 관용구라고 들어 있으니 한자말이 완전히 굳어서 우리 말처럼 되어 버린 셈인데, 역시 지난 번과 똑같은 질문을 한 번 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럼 자주 쓰이는 불구는 과연 한자로 어떻게 쓰는 것일까?

역시 나는 대답을 못했고 불구라는 뜻의 의미도 미루어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또 국어사전 찾기. 국어사전에 '불구'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다.

불구. 불구하다의 어근

어라, 그럼 이제는 불구하다를 찾아야 한다. 계속해서 불구하다를 찾았더니 엠파스 국어사전에는 예문까지 들어가면서 아래와 같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불구하다2 [동사] 
[동사]「…에」「-음에」(‘-에도/-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으로 쓰여)(‘-음에도’ 대신에 ‘-ㄴ데도’가 쓰이기도 한다) 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 ≒물구하다.

몸살에도 불구하고 출근하다
우리 삶의 이상도 끝내는 도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무지를 이용해 거짓말을 하고 또 속는 것이나 아닐까?≪이문열, 시대와의 불화≫
일정 기간 동안 간기를 빼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질펀하게 펼쳐진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불러하고 넉넉해했다.≪조정래, 태백산맥≫

예문으로 삼은 문장을 쓴 분들은 차마 이름을 거론하기 조차 어려운 우리나라의 대문인들이다. 이런 분들도 쓰는 '불구하다'이니 일개 블로거인 나로서는 그냥 아무 소리 않고 받아들여 얌전히 쓰는 것이 좋겠지만 그래도 한 번 짚고 넘어가기는 해야 겠다. 적어도 아, 이게 한자말이고 이 한자말이 굳어져 우리 말을 더 어렵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은 같이 했으면 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문인들의 문장은 감히 건드릴 수 없으므로 ^^ 또 다시 신문 기사를 한 번 찾아보자. 이번엔 중앙일보다. '불구하고'라는 낱말로 찾았더니 역시 같은 날 신문에서 21번이나 쓰였다. 그래, 이 정도면 '불구하고'는 이제 더 이상 한자말이 아닌 우리 말로 여겨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장을 감히 한 번 고쳐보도록 하자.

보도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 교수는 자신이 직접 조씨에게 이메일을 보내... (중앙일보 2007년 4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그런데도 로이교수는 자신이 직접 조씨에게 이메일을 보내...

어떤가. 이 문장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럼 아래 문장을 한 번 더 보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넘겨주지 않고 있다

패배했는데도 정권을 넘겨주지 않고 있다

위 문장에서는 ~음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이 단순히 한자말을 써서 멋을 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게 확실하다. 불구하고를 뺐는데도 전혀 문장이 어색하지 않을 뿐더러 훨씬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 보자.

이번의 비극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계 학생들을 차별대우하는 일은 ...

이번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지만 아시아계 학생들을 차별대우하는 일은 ...

이 문장에서도 굳이 불구하고라는 말을 써서 문장을 어렵게 만들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는 것은 이미 이 말이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쳐 놓고 보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 있는 '이번의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말 때문이다. 앞 문장에 한자말이 나오면 뒷 문장에서 역시 한자말이 나와 받아줘야 덜 어색하다. 이것이 말과 글의 무서운 점이다. 앞 말을 한자말로 썼기 때문에 뒷 말도 한자말로 써야 어색하지 않다는 것... 차라리 이 문장은 이렇게 고치는게 좋겠다.

이처럼 슬픈 사건이 일어났지만 아시아계 학생들을 차별하는 일은...

물론 문장이란 글 전체를 통해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이 맞다. 따라서 여기서 이렇게 한 문장만 달랑 떼어놓고 이렇니 저렇니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한가지 여기서 하고픈 얘기는, 그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한자말 속에 묻혀 살면서 좋은 우리말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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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blog.magicboy.net BlogIcon Magicboy 2007.04.19 08:4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왠지 '불구하고'라는 말을 붙이면 '하지만' 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강조하게 되는것 같아서 자꾸 쓰게 되네요. 이게 한자어라는건 지금 처음 인식했어요..ㅎㅎ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4.19 09:09 신고 수정/삭제

      '~하긴 하지만'이라는 뜻이 강하게 보이도록 관례처럼 쓰여온 거지요. 뭐 저는 그 말을 이제 와서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구요, 한자말이 알게 모르게 많이 들어와 있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랍니다. ^^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04.19 09:59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음.. 이 컬럼 좋아요.. ^^ 계속 이어가시길.. ^^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4.20 09:56 신고 수정/삭제

      ㅋㅋ 과연 몇 회나 갈 수 있을지~ ^^ 오래 가도록 도와주세용~

  • Favicon of http://biog.empas.com/bouquetdor BlogIcon 진주애비 2007.04.19 18:4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또 하나 배웠습니다
    그런데 포스팅시간이 03시30분인데 안 주무신건지..일찍 일어나신건지..
    갑자기 궁금..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