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다 - 뉴보잉보잉

대학을 졸업하고 첫 겨울, 엄마가 사준 바바리 코트를 멋내어 입으면서 이런 소망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바바리 코트 주머니엔 시집 한 권 넣어가지고 다녔으면 좋겠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연극이란 걸 놓치지 않고 봐야지. 그래, 아직도 기억 난다. 그 때 내 바바리 코트 주머니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정희 시인의 ‘아름다운 사람하나’가 들어 있었고, 여의도 백화점 건물에 있었던, 학교 주변 식당에서 나눠주는  할인쿠폰을 가지고 가면 1천원에 볼 수 있었던 연극 표가 몇 개 있었을 게다. 

십 오년도 더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소망은 내 다른 꿈들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없지만, 바바리 코트 속에 들은 시집과 연극에 대한 애틋한 느낌 만큼은 내 감정의 밑바닥에 조용히 깔린 로망이 되었다. ‘연극을 보는 일’ 정도는 주머니에 시집 한 권 넣어가지고 다니는 일 정도로 부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대체 연극이란 걸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으니…

얼마 전, 무작정 연극이 보고 싶어 대학로엘 갔다. 다행스럽게도 사랑티켓을 파는 곳에서는 대학로에서 현재 공연 중인 연극들의 리스트를 볼 수 있으니 사전 정보가 없이 무작정 갔다 해도 다리 품을 많이 팔 일은 없었다. 그런데, 티켓 부스 입구가 영 소란 스럽다. 극장은 많고 관객은 부족해서일까. 연극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자기네 연극을 홍보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여간 시끄럽다. 그런데 이거 살짝 불쾌하다. 문화 상품을 파는 사람들에게 호객 행위니, 삐끼(!)니 하는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그들의 행동은 그것과 별 다름 없었고 연극을 골라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들의 접근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어쨌든, 수많은 권유(!)를 무시하고 몇 개의 연극 브로셔를 골라 순서 대로 창구에 디밀었다. 표가 없는 것이면 없다 할 터이고, 있는 것이면 있다 하겠지. 창구에선 무슨 회원 가입을 했냐, 26세(정확한 건 기억이 안 나지만) 이상이냐 이런 걸 물어보던데, 해당되는 사항이 하나도 없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더니 그냥 제 값 다 받고 표를 팔았다. 괜히 깎아주는 건 재미 없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대학로를 좀 돌아다니다가 표를 산 극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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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소극장이 그렇게 만은 줄은 미처 몰랐다. 온갖 군데서 참 다양한 연극들이 공연 중이고, 그 중에는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연극도 꽤 있었다. 아, 다음엔 저런 걸 한 번 볼까? 인터넷에서 미리 정보를 좀 보고 와야겠어, 그런 수다를 떨며 극장 앞에 다다랐다. 사랑티켓 부스에서 산 티켓은 매표소에서 다시 좌석 번호 붙은 걸로 교환을 해야 한단다. 그럴 거면 굳이 거기서 살 이유가 없었는데, 그냥 극장 와서 바로 샀으면 좌석 번호 붙은 티켓을 바로 받을 텐데, 도대체 이거 뭐하자는 플레이지?? 그런 생각을 했다. 역시 정보 없이 무작정 가면 팔다리가 고생하는 법이다.

참, 내가 고른 연극은  뉴보잉보잉이다. 브로셔에 적혀 있는 홍보 문구에 따르면 대학로 최고의 바람난 로맨틱 섹시 코미디극이란다. ^^ 아저씨가 고르기에 딱 좋은 제목이라고?? 천만에, 연인이라면 꼭 봐야 할 작품이란다. 하긴, 나중에 극장 안에 들어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관람객 중엔 내 나이가 제일 많은 건 아니었을 지라도, 꽤 많은 편인 건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공연이 시작됐다. 그런데 초반,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원래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오페라든(이건 본 적이 없지만) 이런 것들은 초반엔 좀 어색한 법이다. 관객도 배우와 극장에 익숙해지고 동화되어야 비로소 재미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살짝 따로 노는 느낌이다. 배우는 오버하는 듯 싶고, 관객은 좀 쌩뚱 맞아 하는 듯 싶다. 게다가, 정말 웃기지도 않는 장면인데 뒤에서 끊임 없이 아줌마 목소리로 흐흐흐 웃어대는 관객 떄문에 난 도저히 연극에 집중하질 못했다. 그 쪽을 힐끔 힐끔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 그건 내 문제만은 아니었을 게다. 오죽하면 내가, 돈 받고 웃어주는 알바생 아니냐고 했을 정도. 오죽하면 중간에 그냥 튀어나갈 뻔 했다.

중반을 지나면서 조금씩 연극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발동이 너무 늦게 걸린 셈이다.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에도 익숙해졌고, 스토리도 흥미를 끌기 시작한다. 뒷 쪽의 아줌마 관객은 여전히 거슬리지만, 역시 사람은 한 번 포기하면 익숙해지기는 하는가 보다. 후반 접어들면서 배우들은 온 몸을 다해 웃기기 시작했고 관객들도 종종 폭소를 터뜨리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과장된 몸짓, 엉뚱한 대사, 반복되는 액션… 이래도 안 웃을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우들의 열연이 절정에 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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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뉴보잉보잉 미니홈피 http://www.cyworld.com/boeing


뉴보잉보잉은, 세 여자와 동시에 바람을 피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세 명 다 서로 다른 항공사에 근무하는 스튜어디스. 비행 스케줄에 따라 매일 다른 그녀들을 만나던 남자 주인공 집에, 백수인 친구가 찾아 오고 비행 스케줄이 엉망으로 꼬인 여자 친구들이 예정에 없이 찾아 오면서 좌충우돌 웃기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초반 관객들의 발동이 너무 늦게 걸린다. 관객들을 살살 끌어들이면서 같이 웃어야 하는 것이 소극장 연극의 최대 장점일 텐데, 초반엔 배우들만 너무 열심이고 관객들은 진짜 구경만 한다. 배우들은 그 분위기에 익숙해 있을지 모르겠으나 관객들은 그렇지 않다. 관객들이 빨리 익숙해지고 같이 호흡해야 배우들도 더 재미있을 텐데… 이건 관객들의 몫이 아니다. 스탭과 배우들이 해야 할 일인 걸. 중반 지나 후반 접어들면서는 지루함을 잊고 재미 있으니 연극 자체가 아주 재미 없는 건 아니지만, 초반 조금 더 빨리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어떨까.

그랬음에도, 연극이란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있는 미디어다. 소극장에서나 즐길 수 있는 생생함, 땀방울까지 다 보이는 배우들의 열연, 이런 건 소극장이 아니면 즐기기 어려운 것들이다. 여기에, 미리 조금만 알아보고 갔으면 어땠을까. 어떤 일을 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해 보는 것도 특별한 매력이 있기는 하다. 우연히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 예상치 못한 일들도 즐거운 법이지만, 사람에게는 항상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조금 더 준비하고 챙겨가면, 훨씬 더 많은 감동이 있는 건 틀림 없는 일일게다. 올해는 더 가기 힘들겠지만, 내년엔 조금 더 많은 연극을 경험할 수 있기를. / FIN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8.12.23 00:52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헉.. 첫번째 사진의 섭지코지가 왜 난 제일 눈에 들어올까?.. ㅜ.ㅜ 궁금하신 분은 아래 URL을 클릭해보시길.. ㅜ.ㅜ

    http://www.zoominsky.com/913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12.26 15:09 신고 수정/삭제

      섭지코지는,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죠~ ㅋ

  • Favicon of http://blog.empas.com/diabloti BlogIcon 정현아범 2008.12.23 08:4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생각해 보니..
    학교다닐 적에 과에 있는 연극학회 공연 함 보고선..
    "연극은 볼 게 아니다"로 규정짓고..
    여적지 한번도 안 가고 있네요..ㅡㅡ;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12.26 15:10 신고 수정/삭제

      그래서 첫 경험은, 제대로 해야 하는 법이여~

  • Favicon of http://midorisweb.tistory.com BlogIcon 미도리 2008.12.24 08:5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연극을 보면서 배우와의 호흡은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거 같아요...부담백배 ^^
    아 그리고 메리크리스마스~
    한해동안 즐겁고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무척 기뻤습니다.
    제 블로그에 2008년 결산 포스팅을 준비했으니 들러주세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12.26 15:10 신고 수정/삭제

      네, 잘 봤어요. 친절히 링크까지 걸어주셔서 감사! 내년에도 더 행복하시길! ^^

  • Favicon of http://stagelife.kr BlogIcon BW 2009.01.13 13:3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는 연극 참 좋아라 하는데...ㅋ
    관객이랑 배우랑 소통하는 건 다른 장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느낌이긴 하니까요~ㅎㅎ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1.14 09:54 신고 수정/삭제

      네, 그것이 연극의 최대 장점 아닐까요~ ^^

  • 대학로 2009.01.28 19:3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근데 그 대학로의 수많은 삐끼들이 모두 3작품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믿으시겠어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1.28 21:52 신고 수정/삭제

      뭐, 주로 들리는 작품들은 몇 개 있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