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 릴레이 시즌2] 수제비의 설움

면 릴레이 : 수제비 :

넌 뭐냐?
뭐냐니?
넌 뭔데 여기 끼냐는 말이다.
내가 여기 끼면 안돼? 나도 밀가루로 만들었고, 국물 내서 끓이고, 바지락 들어가고... 니네들 만들 때 들어가는 거 나한테도 들어 있어.
그래도 넌 안돼.
왜 안돼?
우린 얇고 길어. 넌 짧고 뚱뚱해.
어랏? 너 모양새로 지금 사람 아니, 음식 차별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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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밀가루로 만들고 똑같이 끓이고, 똑같은 재료를 사용하는데, 이상하게 수제비는 맛이 다르다. 그리고 왠지 그 맛은, 어딘가 모르게 슬프다. 비슷하게 끓여낸 칼국수들이 바지락이다 해산물이다 버섯이다 해가면서 나름대로 호화스런 이름을 챙겨가는데 비해 수제비는 그냥 수제비다.

연예인이었던가. 누군가 방송에 나와서 그런 얘기를 했다. 수제비가 가장 싫단다. 어릴 적 너무 많이 먹어서, 정말 질리도록 먹어서 이제는 수제비가 먹기 싫단다. 정말 질려서 그랬을까. 질렸다기 보다는 수제비를 먹어야 했던 그 어릴 적 기억이 미치도록 싫었기 때문일게다. 그리고 대다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수제비는 배고픔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그래서 수제비 맛은 어딘지 알 수 없게, 그냥 슬프다. 게다가 아무리 예쁜 그릇에 담아 놔도 수제비는 그냥 수제비일 뿐, 절대로 폼이 나지 않는다.

나 역시 어릴 적 수제비는 정말 맛없는 음식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음식에 주려 본 일도 없는 나로서는 수제비를 질리도록 먹을 일도 없었고, 집에서도 별미처럼 먹었겠지만, 왠지 그 맛이 싫었다. 똑같이 만드는 칼국수는 먹으면서도 왠지 수제비는 싫었다. 밀가루 음식을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수제비는 싫었다.

수제비의 불쌍하고 없어보이는 맛(!)에 반응하기 시작한 건 아마 서른이 넘어서부터일게다. 두툼한 밀가루 반죽이 고소해지고 고기 육수든 해산물 육수든 아니면 조미료 국물이든 입안에 달라붙기 시작할 때가 말이다. 광화문에 가면 아담수제비라는 조그만 집이 하나 있었는데 이 집에서 몇 번 먹으면서 수제비 맛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었다. 광화문을 떠난 후 몇 년쯤 지나서 우연히 그 근처에서 점심 약속이 생겨 갔다가 이 집엘 다시 들렀는데, 호프집인가를 겸업하게 가게를 고쳤던 것 같았다. 기억의 맛을 현실의 맛이 따라갈 수는 없는 법. 수제비를 먹긴 먹었지만 별다른 감흥 없이 나왔었다.

주변에서 수제비 잘 하는 집 찾기란 쉽지 않다. 맛있다고 해서 가 보면 그냥 그렇네... 하는 말을 남기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긴 수제비란 것이 뭐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기나 했던가. 그런데도 가끔 나는 '수제비'가 메뉴에 적혀 있는 집엘 가면 수제비를 시켜볼까 그런 생각을 한다.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에 지친 내 본성이, 담백한 수제비를 찾는 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싱글즈에서 엄정화가 장진영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렇게 몸이 원하면 해줘야 한다고'. 하긴, 갑자기 과일이 먹고 싶으면 몸 안에 비타민C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몸이 필요한 요소를 본능적을 찾는다고 하니, 가끔 담백한 음식을 먹고 싶은 건 정말로 몸이 자극적이고 강렬한 음식이 지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사한 면 릴레이를 열심히 달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수제비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수제비도 면이라고 우기고 싶었는데, 내 마음 속에서 면과 수제비는 오늘도 아웅다웅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독재자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그만이니까. / FIN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면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 Favicon of http://gamsa.net BlogIcon 양깡 2008.01.17 20:5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정말 수제비는 서럽겠습니다. 블코 '면' 채널에서도 학대(?) 받을지 모릅니다. ㅎㅎ

    조만간 저의 면사랑도 뽐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틀에 한번 먹는 면~... 아. 그 보다 더 사랑하는 회가 있군요. 1주일에 1-2번씩 꼭 챙겨 먹는 회! 지금도 물회먹고 오는 길인데 ^^;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17 21:00 신고 수정/삭제

      ㅋㅋ 저는 회는 그닥 즐겨하지 않는 편이라서~ (맛이 없더라고요~ ㅋㅋ) 여튼 양깡님의 면 얘기도 궁금해져요~

  • Favicon of http://www.kimdahee.com BlogIcon 다희 2008.01.17 21:0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아...글 너무 좋아요. 읽고 짠한 감정이 몰려왔어요. ^-^
    뜨거운 수제비 한 그릇 먹은 기분이랄까요. ㅎㅎ

    몸이 원하니까 먹고 싶은거라고, 그래서 먹어야 한다고하는 건 저도 자주 하는 말인데..
    강하고 단 음식은 처음엔 끌리지만 오래 못먹겠어요- 입에는 좀 거칠더라도 토속적이고 단순한 음식이 좋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쓴 '두부'글과 비슷해서 트랙백 걸었습니다~~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18 02:56 신고 수정/삭제

      원래 좋은 음식은 입에서 먹기엔 나쁘다고들 하지요. 뭐 그렇다고 수제비가 좋은 음식이라는 건 아니지만, 하긴 그래 따지면 나쁜 음식이라고도 할 수 없고... 아참 대체 이게 뭔 소린지 ^^ 트랙백 고맙습니다

  • Favicon of http://mepay.co.kr BlogIcon mepay 2008.01.17 21:02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글의 느낌과 방식이 참 좋군요..오늘 처음 방문하였는데..RSS 등록해놓고 계속 보게 될것 같습니다..
    수제비는 약간 오돌오돌 해야 맛있는것 같습니다..^^

    저도 수제비는 버리고..궁물만 떠 먹습니다..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18 02:56 신고 수정/삭제

      전 수제비 안 버려요~ 다 먹지~ ^^ 자주 뵈요~

  • Favicon of http://kuls.net/~hyangii/tt BlogIcon hyangii 2008.01.17 21:22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요새 올라오는 면이야기는 재밌는 얘기들이 가득하네요.
    글 잘 읽고갑니다~_~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18 02:56 신고 수정/삭제

      면 이야기 있으면 같이 나눠 주세요~ ^^

  • Favicon of http://www.rabbicat.kr BlogIcon 토양이 2008.01.17 21:3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우리 사무실 분들은, 모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나봐요.
    '어렸을 때 음식에 주려 본 적이 없는 나로선'... ㅋ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18 02:57 신고 수정/삭제

      ㅋ 이게 또 이렇게 댓글이 달리니 묘해지는 걸? ㅋㅋ

  • 진주애비 2008.01.17 21:4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ㅋㅋ...이렇게 엄정화의 대사와 수제비가 잘 매치되다니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18 02:57 신고 수정/삭제

      매치가 잘 된다기 보다는... 제가 뭐 여기 저기 좀 끌어다 쓰는 대사지요 뭐~ ^^

  • Favicon of http://happicialist.tistory.com BlogIcon Energizer Jinmi 2008.01.18 12:0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모 밀가루니까 쳐드리지요;;;;

    수제비에 흑주마심 진짜 맛나는데 ㅎㅎㅎ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18 14:45 신고 수정/삭제

      흑주라... .진미님의 내공이 짐작이 안 가는 군요. ㅋㅋ

  • Favicon of http://blog.empas.com/diabloti BlogIcon 정현아범 2008.01.22 11:19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간만에 들렸습네다..
    파찌네서 같이 뵈었으면 더 좋았을걸요..
    머 그날 추워서 다들 후딱 먹고 집으로 튀긴 했지만서도..ㅎㅎ

    어릴 적에 수제비 무지 먹었고, 엄청 좋아했더랬는데..
    그게 먹을 게 없어서 그랬는지는 몰랐더랬어요..
    엄니께서 따뜻하게 키워주신 덕분이겠죠..^^

    울 엄니 두툼하게 떼어 넣은 수제비 생각이 뭉클 솟네요..캬~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22 13:28 신고 수정/삭제

      아, 그랬어? 난 또 다들 2차 찐하게 가신 줄 알았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