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깎이에 대한 추억

엄마는 연필을 잘 깎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내 필통엔 항상 가지런히 깎인 연필 대여섯 자루가 들어 있었다. 연필깎이를 쓰지 않고도, 어쩜 그렇게 엄마는 연필을 가지런히 깎으셨던지.

까만 플라스틱 손잡이, 반달 모양의 홈에서 칼날을 끄집어 내던 연필깎이 칼. 그 칼 하나만 있으면 뭉툭한 연필은 엄마 손을 거쳐 뾰족하고 예쁜 모양으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깔끔하게 깎인 연필이 든 필통은 - 몇 학년 때이던가 어떤 담임 선생이 정말 잘 깎으시네 했던 얘기완 상관 없이 - 어린 나에게 적지 않은 자랑 거리였다. 그렇게 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까지 6년, 2년 터울인 내 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2년을 더 보태 총 8년을 자식들의 연필을 깎아주셨다.

연필깎이가 흔하지 않았던 탓도 있고 엄마의 솜씨가 너무 좋아서일까. 난 스스로 연필을 깎아본 기억이 별로 없고 아직도 연필을 깎는 일엔 서투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필깎는 일에 도전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나름대로 칼을 들고 연필을 깎아 보려 했고, 어떤 땐 손에 자그만 상처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깎은 연필은 울퉁 불퉁 모양도 비뚤어지고 연필심조차도 제대로 다듬지 못해 제대로 쓸 수 조차 없었다.

또 그 무렵 유행했던 알록달록 색깔의 조악한 간이 연필깎이를 몰래 사다가 연필을 빙빙 돌려 가며 깎아봤지만 그 역시 실패. 왜 그렇게 연필심은 잘 부러져야만 했는지. 결국 난 조악한 연필깎이에 대한 안좋은 추억만 남긴 채 연필깎는 걸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 이십년을 훌쩍 넘긴 지금, 공부가 아니라 업무를 위해 연필을 잡아든 나는 연필이라는 필기구가 주는 묘한 향수엔 빠져들었지만 연필깎는 일에 대한 두려움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시내의 대형 문구 매장에서 연필 한 더즌을 골라 들었을 때 연필깍이를 찾은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쓰는 연필과 같은 회사에서 나온 바로 이 넘. 조악한 간이 연필깎이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에도 불구하고 기계식 연필깎이의 가격이 너무 비싸 2차 대안으로선택한 넘. 3,200원의 가격에 만족하며 집어든 넘. 그러나 연필을 처음 깎는 순간 선입견은 눈 녹듯 사라졌다.

어스럭 어스럭 연필을 서너 바퀴 돌리다 헛도는 듯한 느낌이 들어 꺼낸 연필은 기계식 연필깎이에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단정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더욱이 연필깎는 구멍은 두개. 하나는 그냥 연필에 걸맞게 길게, 하나는 색연필에 걸맞게 짧게... 연필과 스타일에 맞춰 깎아주면 된다.

디지털로 가득한 세상. 가끔 아날로그가 주목받은 건, 아날로그 나름대로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테고, 그것만큼은 디지털이 흉내내기 어렵기 때문일게다. 디지털로 글쓰기에 익숙한 요즘, 연필과 연필깎이를 조물락 만지면서 나는 그 향수에 잠시나마 빠져들기를 즐겨한다. / FIN

  • Favicon of http://mbiz4u.tistory.com BlogIcon 미디어브레인 2007.01.09 23:2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나는 자동이 좋은데..ㅋㅋ 초등학교 시절 부자 친구 집에 있던 그 든든한 자동연필깍이에 대한 열등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ㅋㅋ

  • Favicon of http://exchange.tistory.com BlogIcon Rαtμkiεℓ 2007.01.11 21:3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그러고 보니 연필 쓴지 무척이나 오래 됐군요. 뭐랄까, 연필 쓰다가 갑자기 소름 끼치는 기분 드는 게 싫어서 어릴 적 부터 기피했나봐요.(음, 접촉면이 안맞아서 생기는.. 칠판에 손톱 긁는 듯한 느낌의 뭐 좀 미묘한;;;)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1.11 21:39 신고 수정/삭제

      혹시 연필로 사람 공격하는 그런 공포영화 보신 거 아니었나요? ^^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08.01.22 00:0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연필에 추억을 가지신 분들이 많으시네요. ^^
    오늘 저도 연필에 대한 글을 하나 쓰고 ... 가만 생각해보니 연필에 대한 추억이 있는 분이 분명히 있을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행히 ^^ 구글이 연필에 대한 추억을 가진 분들을 다 불러줘서 글 잘 읽고 갑니다.

    제가 쓴 글도 트랙백으로 하나 걸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1.22 13:28 신고 수정/삭제

      그 추억 때문인지 요즘도 연필을 즐겨 쓴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