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너 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한 때 연인이었던 여자가 어느 날 문득 연락해 이렇게 말했다면,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남자가 몇이나 될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 추리소설, ‘옛날에 내가 살았던 집’은 1인칭 화자인 나에게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예전의 애인이 이런 뜬금없는 부탁을 하면서 시작된다. 오호라, 이거 시작부터 묘한 걸??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추리 소설의 내용이 너무 뻔할 것 아닌가 예측할 필요는 없다. 둘의 현재 위치와 관계는 이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 의미가 아니므로.


이렇게 단정해 버리면 이 책에는 인류 최대의 스토리 텔링 주제인 ‘남녀상열지사’가 나오지 않는다고 공표해 버린 셈이 되니, 벌써부터 흥미가 반감되는 사람들도 있을 게다. 그러나 어디 인생사 남녀상열지사가 전부는 아닐터. 남녀상열지사를 일으킬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이 여자는 자기가 냉정하게 떠나온 남자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남자 주인공은 의외로 솔직하다. 은근한 기대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밝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얘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녀는 얼마전 돌아가신 그녀 아버지의 유품 중에 나와 있는 허름한 열쇠와 지도 한 장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하나도 없는 자기에게 이 열쇠와 지도가 틀림없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기억을 찾기 위해 동행해 주기를 요청하는 그녀에게 주인공인 나는 기대도 꺠진 데다(이래서 남자들이란 참… ^^) 기분도 썩 좋지 않아 좋게 사양하려 한다. 하지만 그 때 눈에 띈 그녀 팔목의 상처.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한 나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그녀와 함께 열쇠의 비밀을 캐러 떠난다.

이 부분, 열쇠의 집을 찾아가는 묘사를 읽으면서 나는 우습게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떠올랐다. 왜 그 첫 장면, 이사가는 부모와 함께 길을 잃고 헤메는 모습 말이다. 길이라고 믿기 어려운 비포장 도로를 헤메며 어딘가를 찾는 그 모습. 그렇게 비스무레한 숲 속을 헤쳐 결국은 지도에 있는 집을 찾게 되고, 그 열쇠가 지하실의 출입문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렇게 들어간 별장 같은 집은 뭔가 이상하다. 현관은 아예 폐쇄되어 있어 지하실로 출입할 수 밖에 없고, 모든 시계는 11시 10분에 맞춰져 있으며 23년 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 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그 어색함… 그 집에서 두 사람은 그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집안 구석 구석을 뒤지지만 좀처럼 도움이 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일기장. 일기장을 통해 그들은 그 집의 비밀과 그녀의 기억을 하나씩 찾아가는데…

뭐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결론은 다 밝혀진다. 그것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는 읽는 사람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 ‘악의'처럼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은 누가 범인이냐라는 목적보다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라는 이유에 더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이유란 것이 항상, 도저히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의 반전이다.

이야기를 풀어 가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단 두 명이다. 어쩌다 등장하는 엑스트라 같은 인물을 빼고 이 책은 두 사람이 수수께끼 같은 집 안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간다. 연극으로 치면, 최소한의 배우가 최소한의 공간에서 연기를 펼치는 단막극 같은 셈이다. 단 두 명, 그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자칫하면 지루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리고 독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에 맞닥뜨린다.

이 책을 포함해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총 두 편 읽었다. 하나는 당연히 이 책일테고 또 하나는 앞서 언급한 ‘악의’다. 냉정하게 비교하자면 솔직히 이 책보다는 ‘악의’가 좀 더 재미있긴 하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토양이님은 이 작가의 다른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을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니 아마 그 책이 더 재미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미 추리소설 마니아들에게 히가시노 게이고는 충분히 명성이 있는 작가일테지만, 나처럼 일본 문학이나 추리 문학을 많이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꼭 한 번 접해 볼 만한 작가라 권유할 만하다. 뭐, 항상 주장하는 바이지만, 소설이나 영화나, 일단 재미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일단 읽으면 손에서 떼지 않고 끝장을 봐야 하는 책. 이 책 역시 그 중에 이름을 올릴 만한 책이다.

  • Favicon of http://echoya.com BlogIcon 에코 2009.02.08 18:3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오~ 이거 레이님 후기 읽고 급땡김이에요^^ㅋ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2.08 19:55 신고 수정/삭제

      이 작가에게 제가 요즘 빠져 있어서요~ ㅋㅋ

  • Favicon of http://blog.daum.net/bouquetdor BlogIcon 진주애비 2009.02.08 21:1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그러고 보니 요즘 제가 읽는 소설들의 제목에
    집이라는 글자가 많이 들어 있네요
    ..뭐 빵집은 없지만요 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2.08 22:09 신고 수정/삭제

      흐음, 빵집이 들어간 소설은 뭐가 있을까요~ ^^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9.02.09 10:5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 이 작가는 중독성이 강하다니까.. ^^ 그나저나 언제 읽냐..나는.. ㅜ.ㅜ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2.09 11:02 신고 수정/삭제

      토양이가 읽고 난 뒤에요~ ㅋㅋㅋ (뭐, 하루 저녁이면 그냥 읽어낼 듯)

  • Favicon of http://bongstudio.tistory.com BlogIcon bong 2009.02.10 09:1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완전 궁금해지는 결말~ㅋㅋ저도 읽을래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2.10 09:56 신고 수정/삭제

      이거 말고요 ^^ 같은 작가가 쓴 용의자X의 헌신, 악의 이거 두 권을 먼저 보세요. 정말 죽여요~ ㅋㅋ

  • 필로스 2009.02.12 20:3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토양이님 짠이아빠님 다음은 저요~~
    추리소설 급땡김..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2.12 23:06 신고 수정/삭제

      헐, 보스는 사서 읽으세요~ 책 왔다갔다하는 물류비도 안 나옴! ㅋㅋ 엠유 식구들 같이 돌려 읽으심 되겄네요~ ㅎㅎ

  • Favicon of http://midorisweb.com BlogIcon 미도리 2009.02.13 19:42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다들 책 좀 사서 보세욧~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2.13 23:48 신고 수정/삭제

      ㅎㅎ 그러게요. 책 많이 사서 보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 ㅋㅋㅋ

  • 룰루룰루 2009.03.02 23:1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이분의 광팬이라면 광팬인데 이 소설은 좀 제 취향이 아니더라구요 ㅎ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릴정도로 엄청난 흡입력은 여전하지만 너무 정적이랄까요.. 결말도 사실 보면서 대충 예상해버려서 김도 새버렸고... 근데 히가시노 게이고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친구는 아주 재미나게 읽던.. 흠 --;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3.02 23:28 신고 수정/삭제

      네, 확실히 전작들에 비하면 좀 정적인 면이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