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젊지만 아쉬운, 장정일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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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이분되기 마련이지만 장정일에 대한 시각은 그야 말로 극과 극일게다. 엉덩이가 예쁜 여자로 유명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 '아담이 눈뜰 때',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 그가 발표한 소설들은 적나라한 성 묘사와 파격적인 내용 구성으로 극심한 질타를 받았으나, 그 반면으로 마니아 층을 확보하기도 했다. 속물 근성이 강한 나(!)는 장정일 소설의 기본 구도에는 동감하지 않지만, 그의 책 몇 권을 샀고, 적어도 두 세번은 읽었으며 그가 소설에서 사용한 몇 가지 문학적 표현은 즐겨 빌려 쓰는 편이다. 예컨대, 장정일은 '밥을 뚜벅 뚜벅 말아 먹는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난 가끔 그 표현을 따라 쓴다. 뚜벅 뚜벅 말다니...

그런 그가, 난데없이 삼국지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 발표됐다는 건 아니다. 내 기억에 아마도 2004년 쯤이었을 텐데, 교보문고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서 있다가 아마도 광고를 봤을 게다. 조만간 장정일이 삼국지를 쓴다는. 혹시나 기억이 맞나 책 앞 쪽을 뒤적여 봤더니 역시 맞았다. 장정일 삼국지 마지막 권은 2004년 11월에 1판1쇄가 발행되었단다.

동감하지 않으면서도 장정일 소설을 빠짐없이 사 댄 나니까, 아마 이 책도 샀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난 이 삼국지를 사지 않았다. 다음에 사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아마도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 동안 내가 10권짜리 전집을 읽을 만한 그런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아마도 작년 여름 쯤, 집 앞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게 됐다. 아, 이걸 읽어야 겠구나 했는데 앞 부분 몇 권은 죄다 대출 중이었다. 한참을 아쉬워 했지만 없는 책을 어쩌랴. 그렇게 잠시 생각났던 삼국지 대신 나는 로마인이야기를 잡았고, 2006년은 로마인이야기로 한 해를 버텼었다. 해가 바뀌고 뭐가 바쁜지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봄, 여름, 그리고 가을. 특별한 계획은 없고 연휴는 길었던 추석이 됐다.

긴 연휴에 무얼 할까 망설이다가 생각난 것이 도서관이었다. 그래, 책이나 한 번 보자 그렇게 막연히 찾아 갔는데 딱 걸린 책이 바로 장정일 삼국지였다. 이번엔 1권부터 순서대로 다 있었고, 한 번에 3권까지 대출할 수 있었기에 1권부터 3권을 빌려와 읽기 시작했다. 세 권은 추석 연휴에 끝. 그리고 주말에 주로 읽다가 오늘에야 10권을 다 읽었다. 9월 말에 시작해서 10월 20일에 끝냈으니, 얼렁뚱땅 한 달은 걸린 셈이다.

삼국지란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고들 한다. 지금까지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삼국지는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다. 대중의 호감도나 정치적 성향에 상관 없이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 최고 작가 중 한 사람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이문열의 삼국지는 한 번 잡으면 숨을 쉬지 않을 정도로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고우영 삼국지. 고 화백 특유의 입담으로 그려낸 성인용 삼국지인 고우영 만화 삼국지는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많이 읽힌 삼국지가 아닐까 싶다.

출판사에서 광고하는 문구에 따르면 장정일 삼국지는 기본 사관이 다른 삼국지란다.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삼국지가 유비, 관우, 장비와 제갈공명을 우리 편으로, 조조를 상대 편으로 생각하고 쓴 데 비해 역사를 실제적으로 해석해 다시 썼다는 얘기다. 실제로 몇 가지 시도는 기존 삼국지와 좀 다르다.

삼국지는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장정일은 황건적이라는 표현 대신 황건군이라고 썼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부정부패에 찌들은 관료에 대응해 일어난 농민 혁명군을 어째서 도적이라고 부르냐는 거다. 그래서 황건군의 수장인 장각 형제들은 도적 우두머리가 아닌 거의 교주로 묘사된다.

초선의 존재도 특별하다. 보통 초선은 왕윤의 수양딸로 수양 아버지의 애국심을 존경한 초선이 스스로 몸을 망쳐가며 동탁과 여포를 이간한다고 나오는데 장정일은 초선을 단순한 궁녀로 본다. 동탁과 여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마음이 이리 저리 흔들려서이지 의도적으로 이간하려는 건 아니었다는 거다. 하긴, 초선이라는 존재가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과장되었다는 얘기는 나도 어디선가 들은 듯 하다.

그러나 이렇게 몇 가지 색다른 시각이 있고, 현대인에 맞게 고쳐 쓰려는 노력을 보이기는 했지만, 장정일 삼국지는 무언가 조금 아쉽다. 중간 중간 너무 잛게 끊어 쓴 문장들은 외려 책 읽는 흐름을 방해했고 새로운 시각이라고는 했지만 촉나라를 우리 편으로 생각하게 한 기존 삼국지와 큰 관점의 차이는 없다고 느꼈다. 책 뒤에 적어 놓은 출판사의 광고 문구는 그야 말로 광고 문구일 따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삼국지를 쓴다는 건 대단한 일임에 틀림 없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게다. 그래서 난 이 책이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권하고 싶다. 어쨌든 새로운 시각이 보이니 삼국지를 색다른 각도에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삼국지는, 젊은 삼국지라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장정일이라는 작가에 대한 내 호감은 훨씬 더 증폭 되었고, 누군가 삼국지를 읽는다고 하면 장정일 삼국지를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할 것이다. 감히 이런 부탁을 해도 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장정일 삼국지가 한 번 더 업그레이드 되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언어와 시각으로 조금 더 다듬어 졌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숨 한 번 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읽어내려가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나는 한 번 더 이 책을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 진주애비 2007.10.21 23:5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삼국지를 다시 잡아볼까 고민만 하고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오면 장정일 아니면 전유성입니다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10.22 00:50 신고 수정/삭제

      아, 전유성하면 구라삼국지 말씀하시는 거지요? 저도 그거 한 번 읽어볼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ㅋㅋ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10.22 08:4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휴.. 아직도 맛의 달인은 침대 탁자에 그대로.. ㅜ.ㅜ 도무지 책 읽을 시간은 언제쯤 날까?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10.23 09:45 신고 수정/삭제

      ㅋㅋ 책 읽을 시간이 딱 정해져 나오겄어요~ 그냥 틈 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 읽는 수 밖엔... >.<

  • Favicon of http://maggot.prhouse.net BlogIcon 한방블르스 2007.10.23 02:2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도 이 책을 읽고 싶은데 말씀처럼 광고와 내용이 틀리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네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10.23 09:46 신고 수정/삭제

      삼국지는 어차피 여러 번 읽으시는 거니까 ^^ 한 번 쯤은 읽어보셔도 좋을 듯 한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