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서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다가 나는 문득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를 떠올렸다. 1991년 쯤 나왔을 이 책은, 음란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판금 조치 된데다가 저자인 마광수 교수는 이듬해인가 구속까지 됐다. 운좋게도(!) 판금 되기 전에 책을 구해 놓은 친구 녀석 덕에 난 즐거운 사라를 읽을 수 있었는데, 읽고 난 후 내 소감은 이랬다. 이게 뭐?

팔팔한 이십대 청년에게 그런 정도로 굳이 사람을 잡아 넣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게다. 그러나 사실 내용이 평범한 건 아니었다. 행위 장면을 꽤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으니까. 그러면서 아마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는 기준이 뭐냐, 하면서 세상이 참 시끄러웠다. 지금은 판금에서 해제되어 살 수 있을까 하고 인터넷 교보문고를 검색했더니 품절이란다.

즐거운 사라가 예술인지 외설인지 나는 구분할 재주는 없고(솔직히 이런 건 읽는 사람이 구분해야지, 누가 읽어라 마라 할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아는 것 한 가지는, 즐거운 사라는 사랑에 대한 책은 아니라는 거다), 요즘 읽고 있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은, ‘외설은 행위에 집중하는데 비해 예술은 마음(또는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였다. 뭐 이런 거다.



포르노나 속칭 야설 같은 것들 대부분이 스토리에는 별 관심이 없고 행위에만 집중하는 반면 명작이라고 부르는 책들은 출판 당시에는 비판을 받았을 지언정 어쨌든 행위 보다는 행위 전후를 중심으로 사람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상을 묘사하고, 당시의 현실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그 치밀한 심리 묘사에 감동하고, 그 심리를 통해 사회상에 대한 비판이든 애정이든, 글로 표현해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명작은 탄생하는 것일 게다. 흔히 우리는 그 심리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 나타난 성애 장면 묘사는 꽤 구체적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행위의 묘사가 아닌, 심리의 묘사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작가는 정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어휘로 표현해낸다. 게다가 내가 읽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하나인 이 책은 꽤 매끄럽게 번역되어 읽는 도중 어색한 단어가 튀어나와 걸리적 거리는 느낌도 거의 없는 편이다.

오늘 아침 같이 일하는 토양양이 보내준 인터넷 포춘 쿠키를 깨 보니, ‘무한한 사랑만이 인생을 즐겁게 한다'는 메시지가 튀어 나왔다. 어떤 마음이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 무한한 사랑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한다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고 또 버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도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와 사랑의 자유로움은 결국 어디선가 충돌하고 마는 것 아닐까.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으로 나는 사랑에 대해 길을 잃는다. 그러나 그 길을 안내할 사랑이 따로 있음을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 코니도 언젠가는 그 길을 찾아낼 것일테니.

  • Favicon of http://no1sal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09.06.01 15:2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우야든동 다 봤다는..(ㅡㅡ)v

  • ^^ 2009.06.02 14:1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전후 심리 표현이라.......... 꼭 읽어봐야겠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