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람의 본능에 회의를 느끼다 - 추격자

점심시간에 밥 먹으면서 수다를 떨다가 오랫만에 제대로 된 한국 영화가 나왔다는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추격자란다. 이 영화를 먼저 본 한참 어린 동생 녀석은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 전 손예진이 나왔던 '무방비도시'까지 몇 편의 한국 영화에 실망을 했던 나는 사실 이 영화에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게다가 말이 동생이지 띠동갑도 안되는 훨씬 어린 나이의 녀석이 남긴 소감이라 과연 나하고도 공감대가 이뤄질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분위기는 무르익어 저녁 퇴근 후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2008/01/18 - [미디어 다시 보기] - 보면서도 내내 아쉬운 '무방비도시'

개인적으로 강변CGV의 스타관은 참 좋아하는 극장이다. 일단 좌석이 크고, 간격이 넓다. 다리를 넉넉하게 뻗어도 된다는 말이다. 단지 옆에서 좀 떠들지만 않으면 아주 괜찮은 극장인데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군데 군데 좀 소란스러웠다.

그래. 사람이 많았다. 개봉한지 꽤 되는 영화일텐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건 영화가 바람을 타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소문이 좋기는 좋은가 보네, 나도 모르게 은근 슬쩍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투덜 거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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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이 영화가 재밌다고 한 어린 녀석과 코드가 맞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하고, 결말을 궁금해 하며 영화를 봤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확실히 재미있는 영화다. 지루해할 틈도 없고 영화의 흐름도 그리 녹녹하지는 않다. 역시 시나리오가 탄탄하니 영화가 재미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 두 주연 배우의 연기도 딱, 딱 어울렸다. 왠만하면 감정 이입을 안 하는 나도 패고 싶었을 정도니까.

영화의 긴장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이 영화를 재미있다고 하는 걸까.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처참히 죽이고, 결국 관객들이, 살아 남기를 소망하는 마지막 여인까지도 죽이는데 왜 이 영화를 재밌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영화를 주인공이 범인을 잡아내는 것으로 확실한 결말을 냈고 시나리오 부실한 다른 영화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티미한 찝찝함을 남기지는 않아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끔찍함의 농도가 꽤 진한 이런 류의 쾌락에 반응하고 있다는 자체가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잔인하고 섬뜩한 장면을 따지자면 굳이 이 영화 말고도 수많은 영화들을 뽑아낼 수 있을 게다. 당장 기억나기론 킬빌이 그렇고, 거대한 전쟁신을 자랑하는 판타지 영화들도 그렇다. 그런데 그 때는 쾌감으로 받아들여도 좋은 그런 감정이 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내 마음에 날카롭게 꽂히고 마는 것일까.

아마도 영화의 현실감이 훨씬 강해서 그랬는 지도 모를 일. 눈에 익은 우리네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죽이지 않아도 될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의 소망을 철저히 무시하며 망치를 휘두르는 또 다른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는 영화 속의 허구 보다는 현실의 본능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 쾌감을 도구로 삼으면 그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이상하게 오늘 만큼은 대리 만족을 즐기는 내 스스로의 본성에 회의가 든다. 이런 기분일 때는 그저 웃고 즐기는 영화로 '해장'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거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다.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8.03.18 01:3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ㅋㅋ 에이 뭐 이정도 가지고서리.. ^^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03.18 01:44 신고 수정/삭제

      아, 오늘은 괜히 민감한 날(!)인가봐요 캬캬

  • Favicon of http://www.rabbicat.kr BlogIcon 토양이 2008.03.18 12:3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도 '무방비도시' 봐버렸어요.- - 어머니가 하나TV로 보고 계시길래 어쩌다가..
    나름 가드를 올리고 봐서 그런지 별 느낌 없었어요. ㅋㅋ
    (정말 아무 느낌이 없었어요.ㅠㅠ)

  • Favicon of http://blog.empas.com/bouquetdor BlogIcon 진주애비 2008.03.18 22:3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이 영화 전 안 봤지만
    진주에미가 심야로 보고 와선
    완전 쇼 하더라고요 지하주차장에 못 가고
    방에 들어 와서도 잠 못 이루고 애들용 만화 디비디 켜 놓고 난리였습니다..ㅎㅎ

  • 페탈이 2008.03.21 17:2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음.. 외람된 말이지만,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티미한 찝찝함 <- 이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나요?(아니, 무려 해석 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