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유전자를 극복하는 법

아빠가 딸에게 가르쳐야 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12
부족한 유전자를 극복하는 법

현대 과학이 인체의 비밀을 속속들이 파헤치면서 인체에는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풀지 못했던 인체의 비밀이 유전자와 각종 신경, 호르몬 등등(이외에도 수많은!) 때문이라는 걸 밝혀냈으니까요. 엣지 재단의 존 브록만이 편집한 ‘위험한 생각들’이라는 책에는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만을 골라 태어나게 할 수도 있다는 그야 말로 위험한 생각도 나옵니다. 솔직히 할 수 있다면 좋은 유전자만 골라내는 게 더 좋을 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사람은 유전자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존재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 아이에게 가장 미안한 건 좀 모자란(나쁜 이라는 표현보다는 이게 좀 나을 듯 해서요) 유전자를 전해줬을 때일 겁니다. 아빠를 닮아 눈이 나쁘고, 엄마를 닮아 키가 작고 뭐 이런 것들 말입니다. 신체 뿐이겠습니까.  아빠를 닮아 체육과 미술을 못하는 걸 보면, 진짜 유전자 꺼내서 때려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네, 저는 체육과 미술 진짜 지겹게 못했습니다. ㅜㅜ

이 아이는 제 딸이 아닙니다 ㅜㅜ 사진은 글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ㅜㅜ 출처 : Evoo73 by Flickr


어제 저녁, 딸 아이가 갑자기 축구공을 찾습니다. 창고에서 축구공을 꺼내 온 녀석이 방에 들어가 바닥에 이불을 깔더니 공으로 뭔가를 열심히 연습합니다. 아, 설마? 불현듯 악몽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체육 시험. 양 발로 축구공을 차 올리던 그 시험. 정말 열심히 연습했는데도 두 개 밖에 차지 못했던 그 시험. 설마  딸 아이도 그 시험을??

불길한 예상은 꼭 맞는 법입니다. 문 틈으로 엿보니 무릎으로 열심히 공을 차올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한 개 밖에는 못 찹니다. 에휴, 저걸 어쩌나, 속으로 혀만 끌끌 차다가 제 할 일을 하고는 삼사십분 뒤에 다시 방에 가봤더니, 이 녀석이 울고 있는 겁니다. 체육 시험은 내일이고 열 한개를 차야 만점인데 아무리 차도 한 개 밖에 못 차겠다는 겁니다. 이미 벌겋게 변해버린 허벅지가 딸 아이의 악전고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아빠도 정말 못한게 그거 였는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해서 아이를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자, 아빠가 시범을 보일테니 한 번 보렴”

시범은 보이나 마나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빠는 겨우 두 개를 찰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말도 안되게 웃기는 포즈로 말이지요. 눈물이 비쳤던 아이는 살짝 웃는가 싶었지만 금새 또 시무룩합니다.

“공을 못차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빠가 못해서 그런 거야. 그래서 진짜 미안해.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잖아? 아빠랑 같이 한 번 해보자”

그렇게 다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차지는 못해도 볼 줄은 안다고, 가만 보니 딸 아이가 공을 너무 높이 튕깁니다. 게다가 한 번 튕기면 겁이 나서인지 바로 공을 잡아 버리고요.

“공을 너무 높이 튕기지 말고 무릎 바로 위보다는 허벅지 쪽으로 차면 되겠다. 그리고 공은 잡지 말고 찬다고 생각해”

말도 안되는 코치를 했지만 그래도 하다 보니 좀 됩니다. 혼자서는 한 개 밖에 못 차던 녀석이 어느 틈에 두 개를 찹니다.

“좋아 좋아, 두 개까지 차고 세 개 째는 어떻게든 발만 갖다 대. 그럼 세 개는 차겠다”

목표는 세 개. 만점이라는 열 한개에는 택도 없는 일이지만 한 개보다는 나은 거 아닙니까. 옳지 옳지 하면서 토닥 거리는 틈에 세 개도 차고, 어쩌다 네 개도 차고, 세상에.. 여섯 개까지 찼습니다. 아빠는 해도 안되는 걸 딸 아이는 해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 하는 게 있으면 못하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물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고, 날씬하고 거기에 예쁘기까지 한 사람도 있습니다. 신의 축복인 걸 어쩝니까. 우리는 우리 대로 신이 준 선물이 있는 거고, 그걸 열심히 개발해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체육 시험 결과가 궁금해서 문자를 했더니 배시시 웃으며 3개를 찼다고 답이 왔습니다. 좀 더 찼으면, 그저 아쉽긴 했습니다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부족한 부분은 솔직히 인정하고, 대신 해야 할 땐 최선을 다하기를 가르칠 뿐입니다. 유전자가 좀 모자라면 어떻습니까.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극복할 수 있는 거고 다른 걸 잘 한다는 걸 알면 되는 거지요. 원래 세상은 사람이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 달라지는 거니까요. / FIN
  • Favicon of http://monomato.com BlogIcon 모노마토 2010.06.16 10:0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저같으면 야 그것도 못하냐~ 이러면서 구박했을텐데..
    언제나 보면서 오늘도 큰 감동을 느끼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6.16 10:08 신고 수정/삭제

      ㅋ 감동씩이나! ㅋ

      물론 모노마토군은 안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
      아이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 중 하나가
      야, 너 그거도 못하니, 일걸? ^^

      땡스!

  • Favicon of http://no1sal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10.06.16 18:4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역시 멋진 아빠!!!

    ※ 체육과외가 왜 생겼는지 알겠어요..ㅡㅡ;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6.17 09:05 신고 수정/삭제

      ㅎㅎ 하긴 요즘 아들들은 축구하려고해도
      어린이 축구 클럽에 가입해야 한다더만.

      우리 땐 공만 들고 나가면 아무데서나 찼는데! ^^

  • Favicon of http://www.iloveuk.kr BlogIcon 행복한꼬나 2010.06.17 08:39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너무 자상하세요. :) 아빠가 못해서 그래, 아빠의 유전자거든,라고 말 해주는 아빠. 멋져요. ><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6.17 09:05 신고 수정/삭제

      그런데 부작용이 있다네.
      이 녀석이 이젠 뭐하다가 안되면 다 아빠 탓을 한다는! ㅜㅜ

      잘 지내지?? ^^

  • Favicon of http://angelboy.tistory.com BlogIcon 천사보이 2010.06.17 12:5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트랙백타고 왔어요.
    '문자해서 3개찼다는 답장'이라는 내용에서
    따뜻함을 느꼈어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6.17 14:18 신고 수정/삭제

      ^^ 어떤 트랙백을 타고 오셨나요? ^^

      고맙습니다

  • 진주애비 2010.06.27 19:33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97번째 이글을 읽으며
    레이님의 공주님사랑에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아울러 부족한 자신의 애비노릇에
    깊은 성찰과 후회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상한 아빠의 표본 레이님..언제나 건강하세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6.28 16:48 신고 수정/삭제

      아마, 새 글 업데이트가 없는데 대한 꾸중이신게죠 ^^

      이번 주엔 꼭 맥주 한잔 하자고요 ^^

  • Favicon of http://macmagazine.kr BlogIcon JMHendrix 2010.06.30 17:0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제 아들, 또는 딸의 새끼손가락이 길기만 바랄 뿐입니다. ㅋㅋ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7.01 08:54 신고 수정/삭제

      손가락이 짧더라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걸세~

      물론, 손가락이 길기를 바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