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대한 짧은 생각 그리고 Casa Porta Sauvignon Blanc 2005

솔직히 나는 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워낙 한국식 술 문화에 길들여진 나에게 관찰하고, 음미하고, 심지어 공부하면서 마셔야 하는 와인은 체질 상 맞지 않았다. 게다가 와인만 먹으면 꼭 탈이 나는 것도 와인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물론 이건 와인만 마셔서 나는 일이 아니다. 와인과 다른 술을 섞어 마셨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난, 어차피 기분 좋게 취하자고 마시는 술인데 이것 저것 따지면서 마시는 건 분위기 깨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축이니 와인과 쉽게 친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와인을 싫어한다 해도, 무언가 뿌리칠 수 없는 매력,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용도(!)가 있다. 술 보다는 음식을 즐기고 싶을 때, 독한 술은 부담스럽고 맥주는 배불러 싫은 늦은 밤 괜히 알코올이 땡길 때, 혹은 누군가와 함께 분위기를 만들고 싶을 때 와인은 다른 술들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게다가 묘하게도 내 주변의 애주가 선배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주종을 와인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소주 잔으로 끊임없는 원샷을 해 대던 선배들이 와인이 어쩌구 저쩌구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난 선배들에게 '나이가 드셔서 몸이 술을 지탱 못하니 와인으로 변절하시는 군요'라고 매몰찬(!) 언사를 던지곤 했다. 한국식 술자리에 익숙한 나로서는 선배들의 변절(!)이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나 역시 알코올을 이기기 힘든 나이가 되면서 와인을 접할 기회가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끔 와인을 접하다 보니, 이름이라도 알고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면서 마시는 게 싫다면서 이름이라도 알아야겠다는 건 약간 앞 뒤가 안 맞는 듯 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와인바라는 곳엘 갔는데, 그곳에서 추천해 준 이탈리아 와인이 정말 맛있었었다. 텁텁하지도 않고 달콤하면서도 은근히 취해 오던 그 와인을 정말 맛있게 마셨는데, 이탈리아 와인이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기억 나지 않았다. 게다가 와인이란 것이 얼마나 종류도 다양하고 이름도 복잡스러운가. 그 뒤로 몇 번 이탈리아 와인을 시도했지만, 그 맛을 찾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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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름이라도 알고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에 맞는 와인을 찾으면 그 넘을 열심히 사랑해 줄 생각으로 말이다. 또 맛없는 와인을 두 번 다시 먹지 않기 위해서도 이름을 알아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실행에 옮긴 첫 와인이 바로 까사 포르타 소비뇽 블랑 Casa Porta Sauvignon Blanc이다.

코스트코에서 산 이 넘.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화이트 와인이 마시고 싶어 지나가다가 대충 골라 잡은 녀석이다. 가격은 11,900원쯤. 칠레 와인도 그런 대로 괜찮다는 누군가의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 골라 잡았다. 사실 코스트코 같은 곳에서 와인 하나 고르기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 그게 그것처럼 보이는데, 가격도 다양하고 이름도 다양하고 원산지도 다양하고… 나 같은 와인 초보자는 그냥 뽑기하듯 골라낼 수 밖에.

은은한 와인 색과 달리 맛은 터프했다. 처음 와인을 입에 넣으면 시큼한 맛이 강하게 다가오고 입안에 넣고 굴리다 보면 은근슬쩍 단 맛도 느껴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맛은 없고 강하고 거칠다는 느낌. 취기도 은근히 오른다. 혹시라도 잘못 봤나 해서 알코올 도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정도였으니 아무래도 부드러운 와인을 기대하고 화이트를 골랐던 나로서는 일단은 실패작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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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 포르타는 칠레의 유명한 와인 생산자(와이너리)이고 소비뇽 블랑은 포도 품종이란다. 레이블 아래 쪽에 필기체로 흘려 쓴 큐리코 밸리는 칠레의 와인 생산지. 뭐 이 정도만 알아도 공부 열심히 했다. 다음 번엔, 이 보다 더 부드러운 넘이 걸리길.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