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 그리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

람마다 달리 알겠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시카고’는 뮤지컬 보다 영화로 더 유명했을 게다. 벨마 켈리 역의 캐서린 제타 존스와 록시 하트 역의 르네 젤위거는 어두운 분위기와 끈적 끈적한 스토리, 늘어지는 재즈를 적당히 잘 소화해 낸 캐스팅이라 나는 생각한다. 비록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졸았을 지라도. 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런 스타일의 영화를 좋아한 것도 아니고, 재즈를 즐기는 것도 아니었으니. 솔직히 말하면 캐서린 제타 존스 때문에 봤다고 해도 될 판이다(톰 행크스 나오는 터미널에서 이 아줌마가 예쁘다는 생각을 처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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쨌거나, 감동은 없었다 해도 기억에 남았다면 어쨌든 내겐 그건 그리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을 게다. 그런 시카고가 지난 9월인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었다. 했다는 얘기만 들었지 별로 관심은 없었다. 내용은 다 아는 거고 무엇보다도 티켓 값이 너무 비쌌다. ^^

동 역 근처에 가면 ‘서울열린극장’이라는 텐트 극장이 하나 있다. 텐트라고 해서 대충 쳐 놓은 건 아니고 나름대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극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1020, 21일 뮤지컬 시카고 공연을 한다고 아내가 표를 끊어 놨다. 21일 오후 3시 공연. 21일 공연에는 록시 하트 역으로 옥주현이 나온단다. 아무래도 텐트 극장이라 그런지 관람료가 쌌다. VIP석은 5만원, 이런 저런 할인을 받으니 한 사람에 37천원이 되었단다. 37천원에 시카고를? 그것도 세종문화회관 공연 멤버 그대로? 그렇다면 충분히 구미가 당길 만 한 일이었다. 적어도 옥주현을 볼 수 있다지 않은가(요즘 삼사십대 아저씨들에게 원더걸스가 엄청난 인기를 몰고 있다지만 원더걸스는 누군지 몰라도 옥주현은 알고 있으니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 ^^)

간에 맞춰 공연장에 도착했다. 조금 일찍 가서 주차도 편하게 했고 - 주차 요금도 없다, 아예 주차 티켓을 발행하지 않는다 - 표를 받은 후 공연장을 둘러 봤다. ~ 텐트 공연장이지만 괜찮다. 무엇보다도 깔끔하고 커다란(!) 화장실이라니. 최근 들어 그렇게 큰 화장실은 별로 본 기억이 없다.

간이 되어 공연장에 입장했다. 예매가 좀 늦은 탓이어서 그리 좋은 자리는 잡지 못했단다. 어랏, 그런데 이게 웬일. 거짓말 조금 보태면 의자가, 의자가 완전 야구장 의자였다. 등 반 정도까지 올라오는 간이 등받이가 있는 그런 의자 말이다. , 저 자리에 앉아 어떻게 두 시간 반을 버티지?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게다가 야구 경기장과는 달리 일단 앉으면 꼼짝 없이 움직이지 않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가뜩이나 난, 전날 밤 밀린 일 하나 처리하느라 거의 세 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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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없었을 뿐더러 공연장에서는 사진을 못 찍으니, 아쉽지만 팸플릿으로 자료사진을 대신할 수 밖에. >.<


연이 시작됐고 예상은 들어 맞았다. 공연 30분이 지났을까 도저히 앉아 있기 힘든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공연 중에 몸을 이리 저리 흔들 수도 없으니 꾹 눌러 참고 앉아 있을 수 밖에. 그러다 보니 공연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뮤지컬 대부분을 차지하는 재즈의 지루한(!) 선율은 나를 졸리게 까지 만들었다. 세상에, 옥주현이 시커먼 스타킹만 신고 다리를 다 드러내 놓고 다니는데, 그 와중에 졸다니(!). 아무리 아니라 해도 아저씨가 다 되었구나, 그런 두려운 마음(!)이 울컥 올라오고 말았다. 그 두려운 마음 덕에 잠시 정신을 차렸고 때마침 1막 중에서 제일 신나는 장면인 록시 하트와 빌리 플린의 인형 놀이 쇼가 시작됐다. 아마 시카고 공연 중에서 제일 멋진 장면 중 하나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그런 멋진 장면이었다. 빌리 플린 역의 성기윤과 록시 하트의 옥주현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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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간의 휴식 시간. 아이고 살았다 싶었다. 일어나 몸을 추스리고 나름대로 스트레칭도 하면서 몸을 풀었다. 피곤한 탓도 있었겠지만, 정말 왜 그리 힘들던지. 이래서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 그런 허망한(!)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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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마 켈리 역의 최정원이 끈적한 목소리로 ‘잘 쉬었다 왔냐’고 물으면서 공연은 시작됐다. 내용을 모르고 봤다면 아무래도 흥미 진진하게 매달렸을 거지만 결과를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엔 공연에 빠져드는데 방해가 된 듯. 아무래도 이건 재즈를 싫어하는 내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용은 다 알고 있으니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질 수 밖에.

미 공연을 잘 마친 배우들 답게 그리고 내가 알기로 요즘 한국 뮤지컬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배우인 성기윤과 최정원 답게 공연의 완성도는 높았다. 아이다로 뮤지컬 시장에 입문했던(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렇다) 옥주현도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잘했다. 주인공들보다 훨씬 더 섹시한(!) 의상을 차려 입은 조연들의 춤과 노래에도 박수를 보내기에 충분하다. 잠을 좀 더 잔 상태에서 의자가 편안했다면 훨씬 더 공연에 몰두할 수 있었을 텐데... 졸아 버린 것에 대한 핑계를 애꿎은 의자 탓으로 돌린다.

상 느끼지만 배우들이 직접 눈 앞에서 움직이는 공연은 내가 얼마나 마음을 열고 공연에 몰입하느냐에 따라 재미가 달라진다. 아무리 재미있는 공연이라도 내가 보고 싶지 않고 피곤한 상태라면 빠져 들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좁아 터진 소극장에서 하는 공연이라도 내가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그 재미는 배가된다. 게다가 이번에 느낀 건, 공연을 제대로 보려면 나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도 좀 자두고, 몸도 좀 풀어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말하려고 해도, 창동 열린극장의 의자는 좀 타박해야겠다. 어떻게 그런 의자에 앉아 두시간 반 공연을 움직이지 말고 보라는 것인가. 하긴, 공연장을 꽉 매운 사람들은 말 없이 잘 보는데, 너만 왜 그러냐고 하면 사실 나도 할 말은 없다. ^^

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반도 안 되는 값에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게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걸까. 반도 안 되는 그 값에 더 편한 의자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 / FIN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10.23 23:00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역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키보드...마우스...그리고 의자?.. ^^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10.28 00:39 신고 수정/삭제

      휴먼 인터페이스 장비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