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소름 돋게 한 CD, 그리고 폴 포츠

아무리 차가 막힌다고 해도 아침, 한강을 바라보며 동에서 서로 향하는 올림픽대로는 멋있는 길이다. 마음을 조금만 느긋하게 먹을 수 있다면 강을 바라보며, 하늘을 바라보며, 커다랗게 음악을 틀어넣고 혼자 즐길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마음 한 번 이상하게 먹으면 그렇게 좋은 길이 참 지겹고 힘든 길이 된다.

여의도로 가다가 DMB 방송에서 CD가 나온 지 25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늘의 소사' 같은 프로그램에서 들었다 생각해 오늘이 CD가 나온 날인가 했더니 정확히는 8월 17일 날 나왔다 한다. 1982년 8월 17일,CD를 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행운의 주인공은 바로 아바 ABBA다. 주옥 같은 멜로디로 아직도 우리 귀를 즐겁게 하는, 최근에는 맘마미아라는 뮤지컬을 통해 다시 한 번 명성을 입증한 바로 그 아바다. 나도 아바를 참 좋아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날 감동시킨 CD의 주인공은 아바가 아니다.

아마 이십 년쯤 되었을까.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 쯤이었을 게다. 어쩐 바람이 불었는지 어머니가 오디오를 사주겠다고 동네 오디오 샵으로 데리고 가셨다.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그 때만 해도 에로이카니 인켈이니, 이런 오디오 전문점들이 동네에 꽤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그리 번화가도 아니었는데 에로이카 대리점이 하나 있었다.

키가 1미터쯤 될만한 큼직한 스피커를 양 옆에 세우고 층층으로 쌓인 거대한 컴포넌트 오디오. 3단짜리 미니 오디오만 듣던 내겐 꿈과 같은 오디오였다. 맨 위에 턴테이블이 있고, 그 밑에 튜너, 앰프, 이퀄라이저, 더블데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CD플레이어까지 갖춘 최신형 오디오. 소리를 듣기도 전에 그 커다란 위용에 감탄한 나는 그냥 그 앞에 앉아서 이리 저리 쳐다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때 주인 아저씨가 CD 플레이어를 열더니, 한 장의 CD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전주도 없이 흘러 나오던 목소리. 그건 양희은이었다. 아침이슬이었다. LP라면 당연히 들리는 직직거리는 잡음에 익숙한 나에게 잡음 하나 없이 들리는 그 소리는 이제 막 이십 대를 시작하는 내 감성을 극도로 자극했다. 첫 소절을 들으면서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고, 그렇게 오디오 앞에 주저 앉아 한 곡을 다 들었다. 그리고 그냥 어머니를 쳐다 봤다. '오케이. 조건이 있어요. 이 CD 주세요.' 그 CD 한 장을 나는 얼마나 즐겨 들었던가. 지금도 그 오디오는 부모님 댁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턴테이블은 이미 사라졌고, 부품이 없어 수리를 못하는 일부 기능들이 고장난 채, 아직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양희은 CD 만큼은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다. 이사하면서 없어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잘 들으려고 챙겼는데 너무 잘 둔 탓일까.

그 뒤로 난, 그렇게 많지도, 적지도 않게 음악을 들으며 살아왔지만, 그 뒤로 나를 숨막히게 한 CD는 없었다. 신승훈, 김건모, 엘자와 같은 몇 개의 CD를 사긴 했지만 그냥 즐겁게 들었을 뿐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제임스 골웨이가 가장 최근에 들은 CD였을 게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내 처음 양희은과 같은 숨막히고 소름 돋는 음악을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았다고 해야 할 게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인터넷에서 난리가 난, 바로 폴 포츠 Paul Potts다. 영국의 휴대전화 판매원이라는 이 아저씨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와 소름 돋는 목소리로 순식간에 스타가 됐고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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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음반 매장에 갈 일이 생겨 그냥 질렀다. 320 x 240의 조그만 화면에서 보았던 그 감동을 잊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비닐을 벗겼고 CD를 꺼내 오디오에 넣었다. 익숙한 멜로디가 들리고 하이라이트가 나온다. 그런데,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 때의 감동은 살아나지 않았다. 소름 돋는 느낌도 없었고, 하이라이트를 넘기며 나는 멀뚱 멀뚱 앉아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사람의 감정이란 참 간사하다. 눈으로 보는 것이 사라졌다고 해서 귀로 듣는 감동까지 사라지다니. 노래를 잘 할 것 같지 않은 외모, 비웃는 심사위원들 그러나 잠시 후 들리는 소리는 비웃음을 사라지게 하고 기립박수를 끌어내며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아마도 내 소름은 그 모습을 보고 그리고 들은 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한 번 받은 그 강력한 소름으로 인해 내가 걸었던 엄청난 기대감.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귀로 듣는 음악에서 멀어진 내 감각을 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사무실에서 들었던 그 조악한 스피커 시스템이라니. 당장이라도 내던져 버리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퇴근 시간. 차로 내려와 CD를 꽂았다. 시동을 켜지 않고 – 내 차는 디젤이라 좀 시끄럽다 ^^ - 볼륨을 키웠다. 그리고 다시 그 장면을 상상했다. CD가 되었던 또 다른 무엇이 되었던, 보고 들으면서 소름 돋는 감성이 아직도 내게 있다니. 그런 감성을 일깨워 준 것 만으로도 폴 포츠가 문득 고마웠다. 귀에 거슬리는 억지로 자아낸 듯한 굵은 목소리 대신, 그냥 마음껏 지르는 그의 높은 목소리가 귀에 착착 감기는 걸 느낀다. 역시 난 정통파는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며 볼륨을 조금 더 키운다. 감동은 사라졌어도 머리와 귀는 즐겁다. 수 많은 전략과 마케팅이 난무하는 상업 음악 시장에서 폴 포츠가 어떤 미래를 갖게 될 지 난 알 수 없지만, 이런 정도로 편안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다음 번 CD 한 장 정도는 더 살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건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 FIN

  • 룰루랄라 2007.08.29 07:08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1등이네요. ^^v
    오늘은 여기저기서 일등..

    영국 사람들 스타를 발굴하고
    마케팅 확실하게 성공하고
    그런쪽으로는 아무래도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CD 로 폴 포츠씨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냥 여느 성악과의 노랫소리와
    많이 다르진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1등 먹으면 바로 음반부터 내서
    인기몰이를 순식간에 해 버리니까
    덜 다듬어져 있을테고요.
    그 맛에 더 손이 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요.

    그런데 20년 된 CD 도 밀려나고 있으니..
    정말 20년이예요???
    시간이 이렇게 빠를 수가.. ㅠ.ㅠ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29 07:48 신고 수정/삭제

      ^^ 제가 뭐 음악을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폴 포츠를 듣다 보면, 아 이거 아직 아마추어 티가 좀 나네 하는 느낌이 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딱 꼬집어 어디다 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 전 그 부분이 더 좋던 걸요~ ㅋㅋ

  • 2007.08.29 07:11 ADDR 수정/삭제 답글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08.29 07:5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아.. 그거 복사하니.. 에러나던데... ^^
    오늘은 나의 애장CD 하나 소개해야겠다.. ㅋ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29 09:28 신고 수정/삭제

      애장CD, 좋죠 ㅋㅋ 마음 같아서는 폴 포츠도 DVD였으면.. 했어요~

  • 2007.08.29 08:5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그래서..
    첫 경험이 중요한 것 아니겠싸옵미까.. 홍홍...

  • Favicon of http://blog.empas.com/diabloti BlogIcon 정현아범 2007.08.29 09:5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고등학교 때 엄마 졸라서 인켈 콤포넌트 마련하고 용돈아껴 젤 첨으로 산 작은거인 LP 생각이 나네요..
    동네 시끄럽다고 하셔서 결국엔 헤드폰 끼고서만 들었지만요..ㅋ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29 13:00 신고 수정/삭제

      ㅋㅋ 그랬군. 내 생애 첫 LP는 FR데이비드 워즈, 마이클잭슨 스릴러, 이글스 라이브앨범 이렇게 였다네. 그 중 두 개는 백판~ ㅋㅋ

  • Favicon of http://jpod.tistory.com BlogIcon j 2007.08.29 15:4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그 영상은 편집과 선곡의 힘이라고 봅니다^^ 네순다르마는 삑사리만 안나게 부르면 꽤 감동스럽지요. 전에 공장노동자 출신의 오페라 가수 러셀 왓슨이 영국에서 스타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죠. 시원하게 내지르는 창법에 좋아하는 남성분들이 많더군요.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29 15:51 신고 수정/삭제

      편집과 선곡의 힘 ^^ 저는 워낙 대중적인 사람이어서 편집과 선곡 잘 해주면 금방 감동 받는다니까요~ ^^

  • 손통 2007.08.30 11:5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그 옛날 LP는 아직도 집안에서 딩굴고는 있는데 그걸 들을 턴테이블을 구입해서 들을만한 용기(?)는 아직은 없는거 같애. CD들을 여유도 없이 사는 지금의 모습이 언제쯤 조심스런 손떨림으로 바늘로 올려놓을수 있을까?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30 12:37 신고 수정/삭제

      저도 엄마네 집 창고에 LP 400장 정도 그냥 썩고 있다는 ㅋㅋㅋ 아깝기도 한데, 꺼내 들을 수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보관할 때도 없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