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밤, 처음으로 5km를 걷다

마사이족 워킹 신발을 사고 드디어 살을 빼 보겠다고 공언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도대체 그 동안 뭘 했을까? 계획했던 것처럼 많이 걷지는 못했지만, 일단 신발에 적응하는 노력은 한 셈이다. 점심 시간에 사무실 주변을 좀 돌아다니긴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제, 소주도 가볍게 한 잔 하고 그 기분으로 집까지 처음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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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효도신발 같은 넘을 신고 걸을 준비를 하다


사무실에서 집까지는 약 5km 정도 된다. 솔직히 두어 번 걸어보기는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 날 그냥 터덕 터덕 걷다 보면 사무실까지 온다. 게다가 자전거를 타고 몇 번씩 다녔던 길이니, 길도 낯설지 않다. 게다가 어제는 겨울이지만, 그리 춥지도 않았으니 걷기엔 딱 좋은 밤이었다.

길이 살짝 젖어 있었다. 아마 식사하는 도중 가볍게 비가 내렸나 보다. 가볍게 오른 취기가 찬 바람을 맞으니 외려 상쾌하다. 시간은 열시 오분. 예상 목표 시간은 한 시간. 그렇게 걷기가 시작됐다.

이 신발, 이거 좀 묘하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 녀석은 밑창이 둥글다. 걸을 때도 발 뒤꿈치부터 내딛으면서 둥근 밑창을 굴리듯 걸으란다. 아무래도 그렇게 신경 쓰면서 걷다 보니 몇 백미터 가지 않았는데 종아리에 슬슬 자극이 온다. 게다가 신발이 약간 묵직하다 보니 아무래도 피로가 빨리 온다. 속도를 좀 줄이고 타박 타박 걷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신호가 막 바뀌고 있다. 넉넉하게 건너려면 뛰어야 한다. 그런데, 젠장. 이 신발, 이거 뛰는 데는 아주 쥐약이다. 둥근 바닥 때문에 뒤뚱 뒤뚱 걷는 판이라서 발끝으로 뛰어야 하는데 이게 영 쉽지 않다. 하마트면 넘어질 뻔한 위기까지 겪으면서 첫번째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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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길을 혼자 걷는 건,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니다


2km쯤 걸은 것 같다. 기온이 그리 차갑지 않은 탓에 얼굴은 차갑지만 몸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무거운 발을 끌고 가자니 호흡도 슬슬 거칠어졌다. 그런데 저 앞 횡단보도, 신호가 또 바뀌려고 한다. 뛰면 충분히 건널 수 있지만 이 상태로는 못 뛴다. 할 수 없이 신호 하나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헉헉 댄다.

이거 무슨 신호 연동도 아니고, 내가 발에 이상한 장치를 달은 것도 아닌데, 그 다음 번 횡단보도도 신호가 바뀌고 있다. 에이씨, 이거 왜 이래 하면서 나도 모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뒤뚱 뒤뚱… 다행히 빨간 불로 바뀌기 전에 건너편 길에 도착했다. 돌아보니 이미 빨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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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헐떡이며 내가 지금 막 건넌 횡단보도를 돌아보다


이제 마지막 고비. 저 언덕만 넘으면 집이다. 다리는 슬슬 풀려가고 또박 또박 걷기 보다는 걸음을 끄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술은 이미 다 깼고, 걷기를 잘 한 것 같긴 한데, 매일 같이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든다. 하긴, 목표는 일주일에 두 번, 다음 달부터 세 번이니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집 앞 마지막 횡단보도도 여지 없이 나를 배신한다. 이젠 투덜 거릴 기운도 없다. 마지막 횡단 보도를 냅다 뛰면서 젠장, 젠장을 되풀이할 뿐이다. 헉헉! 시계를 본다는 핑계로 잠시 멈췄다. 지금 시간은 열한시, 목표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 걸은 셈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불평은 했지만 횡단 보도 신호 때마다 웃기는 모양새로 뛴 것이 시간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긴 한 것 같다. 덕분에 잠은 잘 오겠다 싶었다.

이제 첫 걸음을 뗐다. 조만간 두 번째 일기를 쓸 수 있기를.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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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ㅠblog.empas.com/bouquetdor BlogIcon 진주애비 2008.12.09 21:04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소주를 무겁게 두 잔정도 하고
    걷는다면 좀 위험하겠다는 생각이...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12.10 08:05 신고 수정/삭제

      ㅋㅋ 그거 안 마셨으면 걷겠다고 덤비지 못했을 듯 해요. 그나저나 연하장 감사합니다~ 인사도 못드렸네~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8.12.10 07:4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뭐야.. 그 신발 걸으라고 산건데 왜 그렇게 계속 뛰고 있는겨?.. ㅋㅋ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12.10 08:06 신고 수정/삭제

      그러게요. 그 넘의 횡단보도들이 나를 알아보고~ 뛰게 만든다니깐요. 쩝

  • Favicon of http://afterdigital.tistory.com BlogIcon 조선얼짱 2008.12.10 10:2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흠 .. 전 진실을 보고야 말았죠.
    일상에서 매일 신는게 아니시잖아욧!!
    전 그 신발의 효험을 오매졸망 기대했는데 ..
    닥터마틴 스타일의 카멜색 슈즈를 신고 퇴근하는걸 보고는
    완전히 급좌절 및 실망 이었습니다.
    흥~ 이렇게 포스팅용으로 한번만 찍구 안신으시는거 다 알고 있습니다.
    진실은 따로있다~!!!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12.10 10:47 신고 수정/삭제

      매일 못 신어요 >.< 운동할 때만 신는데 ㅋㅋ 그리고 그건 닥터마틴이 아니구. 팀버랜드... 저 겨울에만 신는 ㅋㅋㅋ

  • Favicon of http://blog.empas.com/diabloti BlogIcon 정현아범 2008.12.10 10:39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시작이 반이라고..
    .
    .
    .
    인제 좀 쉬었다가 내년쯤 다시 하시죠..ㅋㅋ

  • Favicon of http://sepial.net BlogIcon sepial 2008.12.12 15:05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건널목에서 인증샷, 가능하면 동영상으로 부탁요...!
    ^^;
    근데 마사이족이 언제부터 신발 신고 다녔죠?
    타이어로 만든 샌달같은 거 신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게 넘 많아....^^;;;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12.12 15:38 신고 수정/삭제

      제가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시고 싶다 이거죠! 흥흥... ㅋㅋ 그나저나 요즘 마사이족은 진짜 샌달 신어요?? 오호...

      어쨌거나 저쨌거나 제발 살 좀 빠지면 좋겠다는! 이래 놓구 점심엔 또 돼지처럼 먹었다는! ㅋㅋ

  • Favicon of http://www.midorisweb.com BlogIcon 미돌 2008.12.20 23:36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도 여의도 공원 가로질러 15분 걷기하면서 살빼기 들어갔는데 블로그로
    이렇게 공언하면 스스로 지키려는 노력을 더 하게 되는거 같아요.
    자신압박 포스팅이랄까. 5km면 얼마나 걸리는지 궁금한데..자주 시도하길~

    • Favicon of http://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8.12.22 00:55 신고 수정/삭제

      머 한 시간 정도 걸리더라고요~ ㅋㅋ 맨 첫 사진은 미돌님 따라하기 였다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