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영웅전 - 편견에 묻혔던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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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난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그 때 만큼 많은 책을 읽었던 적도 없었고 그 때 만큼 책을 읽을 만한 여유가 많았던 적도 없었다. 게다가 어째 저째 해서 근 4학기를 도서관 근로장학생 자리까지 얻어냈으니, 내 대학 시절은 도서관을 떠나 생각할 수가 없다.

도서관을 그렇게 뻔질나게 돌아다녔고, 나름대로 수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손 대지 않았던 책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원에서 출간했던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였다. 나름대로 고고한 문학도였던 나는 어라? 도서관에 웬 무협지? 이거 정말 질 떨어지는 일이네... 하는 편견을 심하게 가졌었고 의도적으로 영웅문 시리즈는 쳐다 보지도 않았다. 손 떼 묻고 낡아서 몇 번씩 책 표지를 보완해야 했던 영웅문 시리즈는 도서관 서가에 어지럽게 꽂힌 채 내 이십 대의 기억에만 남아 있었다.

사회 나가서 이런 저런 직장을 거치던 중,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 있는 직장엘 다닐 기회가 있었다. 예전의 기억을 살려서일까. 점심시간 틈만 나면 서점으로 달려갔고 심심할 때마다 서점에 들르는 것이 버릇 처럼 되었다. 거기에 갈아타지 않고 지하철 한 코스로 45분 걸리는 출퇴근 길도 나를 도왔다. 지하철 타기만 하면 내내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해 난, 200여권의 이런 저런 책을 읽어치웠다.

뻔질나게 서점을 들락날락 거리다 보니 철 지난 탓에
싸게 파는 책들을 손에 넣을 기회가 있었다. 이문열 평역 수호지 전집도 그때 구입했다. 이런 저런 책 값에 부담을 느끼다 보니 싸게 파는 책에는 일단 호감을 가질 수 밖에. 김용의 영웅문을 손에 넣었던 건, 가격이 싸다는,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거다.

영웅문 시리즈 첫번째 책부터 김용은 나를 정신없이 사로잡았다. 무협소설이란 걸 읽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모든 무협소설이 이렇게 방대한 줄 알았다. 대하역사소설이라고 해야지, 이런 걸 어떻게 무협소설이라고 한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정신없이 전 권을 다 읽어치웠고, 내친김에 무협소설에 입문해 보고자 이런 저런 책들에 도전해 보았다.

아, 그러나 나는 몇 권을 더 읽기 전에, 무협소설에 지쳐 버리고 말았다. 주인공의 이름만 다르지, 그 나머지 행적은 결국 그 얘기가 그 얘기였다. 마치 여자 주인공만 바뀐 포르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대다수 무협 소설의 내용이 그렇고 그랬단 말이다. 주인공이 배신을 당해 상처를 입고 버려졌는데 심심산중에서 기연을 얻어 희한한 무공도 배우고 천하의 영약도 얻어 울트라캡숑 강력 무술인으로 태어나 복수도 하고 온갖 여자를 차지한다는, 다 그런 내용이었던 것이다.

결국 다시 나는 김용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김용으로 인해 무협소설에 눈을 떳지만, 김용 외에 다른 무협 소설은 나를 열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김용을 무협작가로 몰아붙인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김용의 작품은 무협이 아니라 대하역사소설이기 때문이었다.

고려원에서 나왔던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가 얼마전 김영사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다. 김영사 주장에 따르면 예전에 나온 책은 모두 해적판으로 번역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내용도 매끄럽지 않단다. 그렇게 예전에 읽은 책의 표현을 어디 다 일일이 기억할 수 있으랴. 그냥 대략적인 줄거리만 기억할 따름이지. 몇 년 만에 다시 읽은 영웅문 1편 사조영웅전은 그 때보다 더 새로운 매력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사조영웅전. 하도 유명해 누구나 다 아는 내용, 말할 이유가 있을까. 별 다섯 개 만점에 다섯 개를 모두 주어도 아깝지 않은 훌륭한 작품이다. 한 번 손을 대면, 쉴 새 없이 읽어야만 하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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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paranmin.net BlogIcon 유마 2007.01.05 00:13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도 국민학교시절 막 영웅문이 발간되기 시작했을 무렵, 서점을 찾아다니며 한권 한권씩 모아 결국 고려원 발간작 18권을 모두 모았었지요. 그때의 감동은 지금까지 저를 무협소설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제 가보로 물려주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단연 고려원 발간의 영웅문 씨리즈라고 말 할겁니다. 그러나!! 제가 군대 간 사이 집이 이사를 하던 와중 무겁다는 핑계로 (사실 책이 좀 많이 있어서;;;) 쓰잘데기 없는 책들만 들고 오고.... 가장 소중히 여긴 영웅문 씨리즈를 모두 버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빡세게 훈련 받을 시기에) 나중에 휴가 와서 알게 되었지만, 그땐 이미 버스 떠난 정거장이었습니다... 그 후, 김영사에서 새로이 출판한다길래 사보았지만... 그 번역이 고려원만 못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지금도 제 책상 옆 책꽂이에 김영사 영웅문이 보이네요... 고려원 발간 영웅문이 내용상 빈 곳이 있었어도... 그 읽는 맛은 더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누구에게나 한번쯤 읽어보아야 될 책을 권하라면 삼국지 보다는 영웅문을 먼저 선택할 것 입니다.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1.05 02:32 신고 수정/삭제

      고려원 것이 불법 번역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던 것 같은데, 여튼 옛것의 추억은 새것이 따라갈 수 없는 법이지요 ^^ 긴 댓글 고맙습니다 ^^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01.05 14:00 ADDR 수정/삭제 답글

    뭐야.. 이건 책리뷰가 아니라.. 본인 자랑이잖어...ㅋㅋ 부럽다.. 대학 4년 근로장학생이라..음냐.. 새로운 사실을 또 하나 알았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