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이런 것까지 닮았을까 ^^

얼마 전, 제 생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생일에는 둔감해지는 법인지, 별 감흥 없이 그냥 식사나 하고 말 일이었는데 난데없이 딸 아이가 포장된 선물을 들이밉니다. 어버이날이든, 무슨 날이든 종이접기 하나 하고 '사랑해요'가 가득 들어 있는 편지를 남발하던 녀석이기에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선물의 내용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뭔가를 들이민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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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노트와 펜 3자루. 노트 위에 있는 펜이 제가 좋아하는 회사 거지요. 하긴 제가 펜을 좀 좋아하기는 해요.


포장을 뜯어 보니, 꼭 딸 아이가 좋아할 만한 수첩과 펜이 들어 있더군요. 펜은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알고 있어서, 그걸 딱 사왔고 수첩은, 일곱 빛깔 무지개 색종이로 만든 스프링 노트였습니다. 선물을 알고 나서, 웃음도 나고, 살짝 울컥하는 느낌도 나고, 잠깐 그랬습니다. 그리고 짧은 순간,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아마도 삼십 년쯤 전, 제가 딸 아이 나이쯤 되었을 그 때, 엄마 생신이었답니다. 어린 마음에 선물은 사야겠고, 가진 돈은 별로 없고(초등학생들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 나름대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수첩 하나, 볼펜 하나를 사 들었습니다. 돈이 좀 남았던 모양인지, 하나를 더 샀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래도 아버지한테 죄송했던 거겠지요. 말로 설명하긴 좀 어렵지만 회색으로 되어 있고 짙은 남색 띠로 제본된 그 얇은 수첩 말입니다. 아마도 M자로 시작하는 회사 제품이지 싶습니다. ^^

난데없이 수첩과 볼펜을 들이미는 저를, 엄마는 물끄러미 바라 보셨습니다. 아들이 선물이라고 사 온 게 기특하기도 하셨을 테고(아마 이게 최초의 생신 선물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 ^^) 도대체 이 쓰잘데기 없는 걸 뭐 하러 사왔을까 황당한 마음이기도 하셨을 겝니다. 하지만 제가 그 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 아마도 두 번째 느낌 때문일 겁니다. 아이구, 애도 참…. 이런 걸 어디다 쓴다고… ^^

삽십 년이 지나, 제가 그랬던 것처럼 딸 아이가 저에게 똑 같은 선물을 들이 밀었답니다. 물론 이제 막 열 살, 열 한 살 나이 때 알고 있는 쇼핑 세상이라는 게 학교 앞 문구점 아니면 동네 수퍼 정도일테니 – 마트는 혼자서는 절대 못가니까 ^^ - 어쩌면 다른 아이들도 똑 같은 걸 선물할 지 모르는데, 그래도 옛 기억이 겹치니, 참 마음이 짠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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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색이 가득한 내지. 일곱빛깔 무지개 색이랍니다. 저하고 같이 일하는 짠이아빠님은 미팅 갈 땐 들고 가지 마라 하십니다 ^^


사실 딸 아이는 저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외모도 그렇고 ^^ 솔직히 딸 아이가 아빠를 닮았다고 했을 때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그냥 인사로 하는 말인가 보다 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해인가 수영장에서 둘이 똑같이 수영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을 보고는 저도 그만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안경 벗고 수영 모자 쓴 제 얼굴과 딸 아이 얼굴이 여지 없이 닮아 있지 뭡니까. 게다가 그 녀석 성격을 가만 보고 있노라면 저 어릴 적하고 그렇게 똑 같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가 부모를 닮는다는 건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지만, 사실 겁이 날 때도 많습니다. 아빠의 좋은 점만 닮아야 할 텐데, 나쁜 점까지도 다 닮아가는 것 같아서 몹시 걱정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란 게 반드시 있는 모양입니다. 먼저 살아 온 경험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분해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 날 저녁 잠자는 딸 아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겉으로 할 수 없었던 말을 해야 했거든요.

딸아, 이런 것까지 아빠를 닮아줘서 정말 고맙다. 아빠의 좋은 점만 골라 닮을 수 있도록, 아빠도 꼭 노력할께. 생일 선물, 정말 고마워.

이 녀석, 알아 듣는지 못 알아 듣는지, 잠결에 고개를 끄떡끄떡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 보다가 조용히 책상으로 돌아가 선물을 꺼내 사진을 찍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삶을 사는 동안, 이렇게 아름다운 기억만 남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랄 따름입니다. / FIN

ps> 다 쓰고 나서 보니 정작 낳아준 엄마, 아버지께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한 듯... 이 글을 보실 일이야 없을 테지만, 못다 한 말 여기에다 또 남겨야 할까 봅니다. 엄마, 아버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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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health.gamsa.net BlogIcon 양깡 2007.08.16 21:10 ADDR 수정/삭제 답글

    레이님, 따뜻한 이야기 잘 봤습니다.

    저는 애가 아직 어려서 아빠에게 선물을 해준 적은 없지만, 날 닮은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을 받고는 합니다.

    그런데 3살이 되고 말이 늘면서 생때도 많이쓰고 동생도 때리고 ^^;;

    요즘은 애키우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구나...란 생각에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계속 반복되겠죠? 부모와 자식간의 이런 느낌은.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길~!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17 00:08 신고 수정/삭제

      ^^ 아이들은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되죠... 그런데 가면 갈수록 부모 욕심이 커집니다~ ^^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7.08.16 21:54 ADDR 수정/삭제 답글

    ㅋㅋ 부러워서 그랬지.. ^^ 또 클라이언트에게 얼마나 자랑하려고.. ^^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17 00:08 신고 수정/삭제

      아들 키우는 아빠들은 절대 이 재미 모를 걸요~ ^^

  • Favicon of http://happyblog.kr BlogIcon 열심히 2007.08.17 00:53 ADDR 수정/삭제 답글

    감동적이네요. 저도 엄마보다는 아빠랑 생김새도 많이 닮고, 성격도 많이 닮았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아빠랑 더 친하답니다. ^^
    울 아부지 은퇴하셔서 요즘 많이 심심해 하시는데.. 이 글을 읽으니 갑자기 친정아버지가 보고 싶네요 ^^
    잘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17 01:10 신고 수정/삭제

      아이고 감동까지야 ^^ 아빠들은 딸하고 정말 얘기를 많이 하고 싶어한답니다. 사정이 안되서 그게 잘 안되고, 시간이 쌓이면서 그게 습관이 되고...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 2007.08.17 09:23 ADDR 수정/삭제 답글

    다찌도 많이 컸겠다...
    에구.. 녀석~~
    보구싶네..

    생일 언질이라도 함 주쥐...
    암튼...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17 09:34 신고 수정/삭제

      그람요. 이제 정말 많이 컸어요~ ^^ 생일이야 뭐~ ^^

  • Favicon of http://blog.empas.com/diabloti BlogIcon 정현아범 2007.08.17 16:05 ADDR 수정/삭제 답글

    저희도 저랑 서연이랑 워낙 붕어빵이죠..ㅋㅋ

    요즘 안약 넣고 있으면, 서연이가 와서 그 참새같은 입을 쫑알거리면서 묻습니다..
    "아빠, 눈 아야아야해?? 눈 아퍼??"
    이뻐 죽습니다..
    기냥 녹아요..

    아들넘은 별 무관심이라죠..ㅡ.,ㅡ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17 17:50 신고 수정/삭제

      그럼 그럼... 역시 딸이 최고라니깐~ ㅋㅋ

  • 진주애비 2007.08.18 12:11 ADDR 수정/삭제 답글

    지났지만 생일축하합니다^^
    아직은 부모가 세상의 모든거라 여길 나이의 아이들을 키우는 중이라
    많은 부분 공감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주인공 딸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뭐 다소 원론적인 생각도.. ㅎㅎㅎ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18 15:19 신고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 머 이젠 축하받기도 쑥스런 나이가 되고 말았더라는... ㅋㅋ

  •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 BlogIcon 실비단안개 2007.08.20 08:43 ADDR 수정/삭제 답글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누군가가 더군다나 내 자식이 나를 닮았다건
    분명 행복한 일이지요 -

    이쁜 따님 - 건강하게 자라시길요 - ^^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7.08.20 11:55 신고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자꾸 블로그에서 축하 받으니 엄청 쑥스럽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