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음주 편력기 #5 - IMF편

97년 10월, 미국에 출장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매년 1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컴퓨터 쇼인, 컴덱스 쇼 관람을 위해서였습니다. 컴덱스 쇼 잘 보고,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남들 다 보는 그렇고 그런 쇼(!)도 보고, 잘 놀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조그맣고 깔끔한 인(아마, 미야코 인인가 그렇습니다)에 이틀 정도 여유가 있어서 묶었답니다. 낮에는 놀러 다니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미국 맥주라도 먹고 가야지, 하면서 슈퍼에서 미켈럽 하고 버드 같은 맥주를 몇 병 샀던 것 같습니다. 호텔로 가지고 와서 마른 안주 몇 개 까 놓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참, 한국에서 가져간 사발면 그 때 같이 먹었습니다.

미켈럽 캔을 4개 정도 먹었을 겁니다. 그러고 기분 좋게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너무 속이 안 좋아서 일어났고, 느닷없이 되새김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변기를 끌어 안고 웩웩 거리다 보니,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고, 탈진 상태가 다 되더군요. 그 다음날 저는 하루종일 호텔방에서 끙끙 앓았습니다. 남들은 다 놀러 나간 그 호텔방에서 혼자 끙끙 앓다가… 선배가 한국 수퍼에서 샀다고 가져다 준 사발면 하나, 국물 받아 먹고서는 그제야 속을 좀 차렸습니다.

그 뒤로 미켈럽이나 버드 같은 맥주는 쳐다 보지도 않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너무 고생을 했었거든요. 아마 맥주와의 이별 ^^은 이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 IMF가 터졌습니다. 현지 신문과 뉴스를 보면 한국이 부도 나서 다 망했다 라는 분위기였는데, 얼마나 살벌했겠습니까? 무슨 전쟁 난 것 처럼 호들갑을 떠는 언론 때문에, 걱정이 말도 아니었습니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여~ 어수선하게 있다가 귀국 길에 올랐죠.

열흘 만에 귀국이었는데, 남겨 온 달러 환전하면서 돈 벌기는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한국은 진짜로 난리가 났었고, 계속해서 그 뒤로 좋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거죠. 우리도 부서 하나가 통으로 날라가고, 그 때까지 지원해 주었던 핸드폰 등 각종 복지 서비스가 없어지고, 연봉 협상 때는 전직원 5% 급여를 삭감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그래도 우리 회사는 거의 손 안 댄 편이더군요. 주변에 다른 회사들 망가지는 것, 다른 사람들 회사 떠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얌전한 편이었습니다.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그 때는 차마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너 별 일 없니? 라고 물어보기조차 겁나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렇게 술 잘 사 주던, 선배들, 높은 양반들이 이제는 술 사 줄 생각을 안 합니다. ^^ 예전에는 그런 걸 본 기억이 별로 없었는데, 회사 앞 간이 분식점 – 튀김과 떡볶이, 오뎅 이런 것 팔던 그런 분식점 – 앞에서 튀김과 떡볶이를 앞에 놓고 소주를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술은 먹고 싶고, 주머니는 가볍고, 아마 그렇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연스레 2차, 3차 술자리는 드물어졌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그냥 일차에서 소주 먹고 헤어지는 그런 형국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저는 삼겹살과 소주, 그리고 된장찌개의 환상적인 맛에 조금씩 길들어져 갔습니다.

어느 날이었든가, 몹시 우울한 날이었습니다. 후배들 몇과 같이 광화문, 평소에 점심 먹으러 자주 가던 N식당에 갔습니다. 이 집은 점심은 별로 맛이 없지만, 저녁에 구워 먹는 생 삽겹살이 아주 괜찮은 집입니다. 값도 부담 없고 ^^ 모처럼 후배들과의 자리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소주 잔이 도는데, 아~ 마치 소주가 사이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원하고 톡 쏘는 사이다 같은 소주 맛에 급격하게 빠진 건 바로 그 때 부터 였습니다. 후배들과의 일차 술자리에서 그 사이다 같은 소주를 원샷, 원샷 그렇게 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빨리 취해버렸던 것 같습니다. 4명이서 열 병 정도의 소주를 마셨던 것 같고, 그날 따라 빨리 취해버린 저를 후배들이 택시에 태워 보냈습니다.

밀렸던 것을 한꺼번에 다 해결하려 그랬었을까요.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 이렇게 보름인가를 주말만 빼고 매일 소주를 마셨습니다. 매번 그 식당 그 삽겸살에 그 소주… 얼마나 그 식당을 열심히 다녔든지, 그 식당 사장님은 제가 그 회사를 그만 둘 때 모였던 회식 자리에서, 저하고 같이 소주 들이키다가 저를 붙들고 울기까지 했답니다. 서운하다고 ^^

그렇게 소주와 친해지면서 맥주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장이 맥주에 거부감을 일으키더군요. 맥주만 먹으면 설사가 나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 때를 지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렇게 맥주와는 멀어지고, 소주와는 점점 더 깊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