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비밀을 만들고 공유하는 법

아빠가 딸에게 가르쳐야 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14
작은 비밀을 만들고, 공유하는 법

고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그땐 탁구가 꽤 유행이어서,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던 저도  친구들과 탁구장 몇 번 갔었지요. 어느 주말이었을 텐데 탁구 치고 좀 느지막이 집에 왔는데 아버지께서 뭐하고 왔느냐고 물으시기에, 탁구 좀 쳤어요, 대답했었습니다. 제 딴에 아버지는 남자니까, 탁구 친 거 정도는 아셔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문제는 밤에 터졌습니다. 성적표를 보여 드려야 했는데 - 왜, 도장 찍어가야 하잖아요. ㅜㅜ - 성적이 좀 떨어졌던 거죠. 엄마한테 야단맞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한 말씀 하시더군요. “공부 안 하고 탁구나 치러 다니니 성적이 이 모양이지.” 아들이 운동하고 담쌓고 사는 걸 아는 엄마는 “얘가 무슨 탁구를 치러 다녀요.”라고 의아해하셨지요. 그때 아버지 말씀이 저한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다 알고 하는 소리야.”

그 뒤로 저는 아버지께 제 비밀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졌다는 뜻은 아닙니다(아이를 키워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 요즘은 아버지와 진짜 사이가 좋습니다). ^^ 하지만, 제 딴에는 아버지와 탁구라는 비밀 정도는 공유해도 되겠다고 싶어 말한 건데 그 비밀이 무기가 되어 돌아오니 많이 서운했던 겁니다. 어쩌면 아버진 이 일을 기억도 못하실 테지만, 제겐 잊을 수 없는 작은 상처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Bert and Ernie: Let me tell you a secret / 20090917.10D.53994.P1 / SML
비밀은 속닥이는 법이지요 ^^ (사진 출처 : Flickr에서 See-ming Lee 李思明 SML님)

그래서일까요. 저는 딸 아이가 제게 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학교 얘기, 친구 얘기, 용돈 얘기, 갖고 싶은 것들... 그런 저런 얘기들을 할 때면 저는 그냥 듣고, 조언할 것이 있으면 하고, 엄마 몰래 용돈도 주고, 가능하다면 필요한 것도 사주고 그럽니다. 아이 입장에선 엄마한테 할 얘기가 있고, 아빠한테 할 얘기가 있는 법이지요. 주로 엄마한테 말하기 곤란한 것들을 아빠에게 할 텐데(물론 반대 경우도 있겠지요 ^^) 그걸 아빠가 엄마한테 다 말하면 딸 아이가 아빠에게만 말한 의미가 사라지는 겁니다. 가끔 아내는 둘이서만 속닥댄다고 투덜대지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도 딸하고 비밀 만드셔. 물어보지 않을 테니까”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쁜 비밀을 공유해선 안 되겠지요. 하지만, 그저 소소한 비밀이라도 공유하면 상대가 훨씬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 비밀이 지켜진다는 걸 알면 또 얘기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겠지요. 딸 아이는 아빠한테 한 얘기는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까 아빠한테는 믿고 말해도 된다는 걸 아는 거지요.

아빠란 존재는 ‘딸 아이가 세상을 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볼 때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항상 내 뒤엔 아빠가 있어, 라고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거죠.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일을 겪게 마련이고, 때론 눈물도 흘려야 합니다. 때론 좌절하고, 넘어지겠지요. 그때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일으켜주고 다독거리는 역할은 친구나 애인이나, 다른 가족들이 할 겁니다. 아마도 그들이 아빠보다 훨씬 더 잘 할 테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기 어려운 비밀 때문에 힘들 수도 있겠지요. 아빠와 딸이 소소한 비밀을 만들고 지키는 연습을 해야 하는 건 바로 이런 때를 위해섭니다. ‘아빠는 비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라고 딸 아이가 믿으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아이는 반드시 뒤를 돌아볼 겁니다. 거기엔 내가 언제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아빠가 서 있다는 걸 딸 아이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 FIN
  • Favicon of http://me2day.net/cheimonas-/ BlogIcon cheimonas 2010.07.14 13:46 ADDR 수정/삭제 답글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많은 부모님들께서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단 부모자식간이 아니라 남녀간에도 통용되는 말이로군요.

  • Favicon of http://no1salr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10.07.14 15:58 ADDR 수정/삭제 답글

    근디 이넘의 아들내미는 비밀로 하기로 해놓구 마님한테 몰래 꼰지르고..ㅡㅡ;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7.14 18:45 신고 수정/삭제

      그래서 아빠가 딸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들이라네. 아들들은 안 먹혀 ㅋㅋ

  • Favicon of http://blog.daum.net/bouquetdor BlogIcon 진주애비 2010.07.14 17:37 ADDR 수정/삭제 답글

    나이 먹어 좀 빌빌거리는 아빠를 위해 우리딸들이 아빠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그날을 위해
    오늘도 전,,,ㅋㅋ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10.07.14 18:46 신고 수정/삭제

      하하 모든 아빠들의 꿈인가요 ㅋㅋㅋ

  • Favicon of http://pp19in.egloos.com BlogIcon 뽀다아빠 네모 2010.07.16 11:27 ADDR 수정/삭제 답글

    음! 그렇죠...아들은 제가 비밀 얘기를 하면...그걸 빌미삼아 엄마에게 일러바치고 지가 엄마의 신임을 얻습니다....저는 아내에게 혼나고....

    그뒤로 아들에게 제 비밀을 털어 놓지 않습니다만.....

    이 글을 읽으니....아들 비밀은 제가 지켜줘야 겠다는 생각이 확실히 드는 군요....

  • Favicon of http://brucemoon.net BlogIcon bruce 2010.12.23 09:20 ADDR 수정/삭제 답글

    비법을 하나 얻어가는 느낌인데요 ^^ 저도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