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향에 푹 빠지는 곳, 보성 차밭 여행

보성이 그렇게 먼 줄 알았다면, 갈까 말까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길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채 알량한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믿고 올라탄 것이 애당초 실수인지도, 아니면 망설일 기회를 잃어버린, 외려 잘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광고에 혹은 드라마에 나왔다는 그 차 밭이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고속도로에 올라 내비게이션을 찍었을 때 나온 거리는 목적지까지 400km가 넘는다는 황당한 얘기였다. 그까짓거… 열심히 달리면 세 시간이면 가겠지~ 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었다.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하다 보면 운전하는 시간 외에도 휴게소에서 쉬는 시간, 배고프니 밥 먹는 시간 등등이 알게 모르게 달라 붙는다. 그러다 보면 목적지까지 세 시간이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처음 계획과 달리 한 시간 정도는 쉽게 늘어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보성은 광주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면 금새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성은, 광주 톨게이트를 빠져나가서도 한 시간은 달려야 나오는, 절대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세 시간이면 가겠거니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실제로 보성에 도착한 것은 출발하고도 다섯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솔직히 알량하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쉽게 찾았지, 만일 지도나 이정표만 의지했더라면 과연 제대로 찾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긴 했다. 고속도로를 지나 보성으로 가는 이정표가 드문 드문 보이고, 그나마 요즘들어 보성 차 밭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은 급조한 냄새가 나는 ‘보성차밭’ 표지판들이 도로 중간에 있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금새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보성을 찾은 기간은 ‘다향제’ 기간이었다. 축제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톨게이트부터 안내가 부실하다는 생각은 보성에 들어서서도 변하지 않았다. 안면도에서 무슨 축제를 한다고 했을 때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IC부터 나붙었던 안내 깃발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는 좀 뒤떨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긴, 다향제를 의식하고 차 밭을 보러 간 건 아니었으니, 다향제에서 뭘 한다 해도 사실 관심은 별로 없었다. 광고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냥 그렇게 시원한 느낌을 주는 차 밭에서 마음 속 고민을 모두 털어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복잡한 머리 속을 식히는 것, 그게 보성 차 밭을 찾은 첫 번째 이유였다.

보성에 들어서서 차 밭 표지판을 따라 주욱 올라 가다 보니, 갑자기 차들이 많아지고 경찰이 나와 길 안내를 하는 곳이 눈에 띄었다. 눈치를 보니 이 곳이 다향제를 하는 무슨 공설운동장 같은 분위기였다. 바깥에서 보니 천막들이 쳐 있고 사람들이 웅성 웅성… 지방에서 열리는 여느 축제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축제에 목적이 없었으므로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차 밭으로 가기로 했다. 미리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대한다업’이라는 곳이 보성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라 했다. 때마침 내비게이션에도 ‘대한다업관광농원’이 버젓이 들어 있어 목적지로 찍어 놓고 그대로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알량한 내비게이션’ 이라는 표현이 또 다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건, 목적지에 다다라서였다. 정확한 지번을 실측하지 못해서인지 한적한 시골길이나 복잡한 이면 도로에 목적지가 있을 경우 내비게이션은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하면 대충 얼버무리면서 안내를 끝내 버린다. 목적지 주변에 오긴 왔는데 정확한 목적지가 어딘지 알 수 없어 헤메고 있어도 ‘목적지 부근에 왔으니 안내를 종료합니다’라는 멘트를 날리는 내비게이션을 보면 그냥 부셔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 때가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국도를 따라 오다 보니 오른쪽으로 우회전하는 길에 차들도 많이 들어가고 주차 안내원까지 있을 정도로 복잡한 농원 입구를 보긴 봤다. 표지판을 자세히 봤으면 그 곳이 대한다업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 내비게이션은 여전히 직진을 가리키고 있어서 무시하고 그냥 달렸던 것이다. 요즘 표현으로 쌩뚱 맞게도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준 곳에는 웬만큼 널찍한 주차장을 갖춘 차 밭이 하나 있기는 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차 밭이구나 하고는 차에서 내리긴 했는데, 웬지 모를 의심은 감출 수가 없었다.

여기가 대한다업일까 하고 봤는데 대한다업이 대자도 보이지 않고 봇재 어쩌구 저쩌구 하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눈치를 보니 ‘봇재다원’이라는 곳이었다. 광고나 드라마에 나온 곳들은 다 카메라로 장난 치는 거니까, 이 정도면 훌륭한 차 밭이네, 그냥 여기서 머무르지 뭐… 하는 생각으로 차 밭에 올랐다.

차 밭은, 산을 깎아내고, 그 산을 모두 차 나무로 두른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산 한 쪽면이 온통 차 밭인 셈이다. 나즈막한 높이의 차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장면, 실로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 진다. 그 사이를 사람들이 오간다. 차 나무를 즐기며, 시원한 공기를 즐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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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전체가 차 밭이어서 시원한 느낌을 주는지는 몰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기대했던 차 밭은 아니었다. 이것 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기교를 살려 영상을 찍었다 해도 이 차 밭이 그렇게 나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뭔가 좀 어설프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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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일부를 담는 것보다 전체를 담는 것이 더 그럴 듯해 보이지 않을까 하고 카메라를 들었지만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고 해서 전혀 운치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저어기 멀리 가로등이 놓인 길을 걷다 보면,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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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제'를 지금 하는 이유가 있단다. 4월말에서 5월초에 따는 차 잎을 '우전'이라고 부르는데 이 넘의 품질을 최고로 친다는 것이다. 가까이서 본 차 나무 잎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뻣뻣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푸르름 만으로도 마냥 예뻐 보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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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 앞 주차장에 놓인 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흐드러지게 핀 붉은 꽃들은 푸르른 차 밭과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엔 너무 서운했다. 아무래도 아까 올라오면서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던 길이 자꾸 신경 쓰였다. 가까운 데라면 몰라도 서울에서 다섯시간이나 걸려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일단 사람 많은데라도 가면 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곳으로 가기로 했다. 봇재다원에서 2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 앞에 세워 있는 간판, 대한다업이 맞았다. 오후 네시를 넘긴 시간이어서인지 아까보다는 들어가는 차들이 적어 외려 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차를 몰아 안쪽으로 들어가니, 주차 요금을 받는 곳이 있었다. 주차 요금은 2천원.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안쪽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주차장 옆 공터에서 다향제 행사들이 열리고 있었다. 비만 오지 않았으면 신났을 노래공연장, 녹차 관련 상품들을 파는 간이 매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향제는 공설운동장과 이곳 대한다업에서 나뉘어 열리고 있었다. 다향제 행사장을 지나 안쪽 주차장에 차를 대고 녹차밭으로 걸어가는데 웬지 느낌이 달랐다. 좀 전에 들렸던 다원은 도로 변에 있기도 해서 주변에 막힌 것이 없었는데, 이 곳은 울창한 숲으로 들러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울창한 나무 숲을 지나면 녹차밭이 눈 앞에 나타나는데, 아~ 바로 여기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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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둘어 쌓인 차 밭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굵고 크고 많은 차 나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산을 타고 조성된 차 밭을 따라 올라 가다 보면 엄청난 규모에 놀라게 되고, 그 굵직굵직함에 감탄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이 곳을 보지 않고 규모가 작은 곳을 먼저 보았던 까닭에 감탄이 늘기도 했겠지만,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고 지나지는 못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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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곳이 광고나 드라마를 찍었던 장소이리라. 차 밭에 묻혀 지나는 사람들이 저리 작게 보인다. 차 밭 사이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봇재다원과 달리 이 곳에서는 차 밭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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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밭을 둘러 싸고 있는 숲도 장대하기만 하다. 차 밭과 숲, 때마침 피어오르는 물안개까지, 보성의 차 밭은 향기롭기만 했다. 아침이라면, 지금이 아침이었다면 그 느낌이 더 신선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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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밭 옆으로 난 산책길이다. 휘톤치트라고 했던가. 나무에서 나는 그 특이한 향이 가득한, 그야 말로 천연의 삼림욕장이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그 진한 향을 맡으며 걷고 있자니 몸의 피곤함도, 마음의 무거움도 절로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보성의 또 다른 볼 거리는 율포해수욕장을 지나는 해안도로다. 대한다업 앞 도로로 나와 봇재다원을 지나고 계속 직진하면 율포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데 이 길의 전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산을 돌아 내려가다 보면 도로 변의 차 밭과 저수지를 낀 마을...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율포해수욕장. 전형적인 남해바다였다. 짙은 뻘 색의 바다가 살랑살랑 마음을 흔들고, 기다란 방파제 끝에 서서 바다 향을 맡으면 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모두 사라진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그 곳은 나를 쉬게 할 지언정, 내 삶의 터전은 아닐지니.

율포해수욕장을 지나 장흥 쪽으로 계속 들어가는 길은 아기자기한 해안도로다. 간간히 드러나는 바다와 또 그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엿보인다. 수문해수욕장에선 때마침 키조개 축제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선 그 가격에 키조개를 먹을 수 없겠지. 키조개 구이 한 접시와 소주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그렇게 보성 차 밭 여행은 막을 내려야 했다.

멀지만 않다면, 얼마든 가고 싶은 곳이 보성이지 않을까. 하루라는 짧은 여정에 아쉬움을 남기며, 그렇게 보성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버렸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