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 아빠가 딸에게 가르쳐야 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4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지는 토요일 오후, 아빠는 잠시 낮잠에 빠졌고 딸 아이는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딸 아이의 전화 소리에 설핏 잠이 깼습니다. 언뜻 들으니 할아버지(네, 제 아버지 ^^)셨습니다. 외출을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셨는데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지하철 역에서 발이 묶이신 모양입니다. 네, 네 두 어번 대답을 하더니, 이 녀석이 부리나케 옷을 갈아 입습니다.

“아빠, 할아버지 우산 없으시다고 하셔서 내가 나갔다 올께” 언뜻 잠이 깬 제게 말을 던지고 곧바로 현관 닫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응’ 잠결에 한 마디 대답을 했지만, 잠에 취한 아빠는 더 깨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꾸벅 꾸벅, 옛날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auggie_tolosa/3402061788/in/photostream/

아마도 제가 지금 딸 아이 정도 나이였을 겁니다. 그 날 밤도 그렇게 비가 왔더랬지요. 전화 벨이 울리고 아버지께서 버스 정류장 앞 가게에 계시다고 엄마가 말합니다. 그 날 제가 아마 기분이 좋았던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우산을 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뛰었습니다. 걸어가면 10분 정도 걸릴 거리를 아마 5분도 안되어 갔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깜짝 놀라셨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립 서비스는 이럴 때 날리는 겁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비를 맞고 계시는데 얼른 와야죠’ 아버지가 서 계시던 그 가게, 저 때문에 매상 좀 올랐습니다. 뭐 먹고 싶냐며 이것 저것 집어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가 그럽니다. ‘니가 우산 가지고 나간 그 날, 아빠가 되게 기분이 좋으셨단다.’ 그 땐 몰랐습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런데 지금 딸 아이가 저한테 그렇게 말한다면, 저라도 기분 째질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한 번 재미를 붙이고, 비오는 날마다 몇 번 우산을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날은 금새 아버지를 만났고, 어떤 날은 허탕을 치기도 했습니다. 당시엔 휴대전화가 없었으니 연락이 안되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하지만 비 오는 날 아버지를 기다리고, 아버지와 우산을 쓰고 돌아오면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런 저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설핏 깬 잠 속에서 저를 붙들었습니다.

딸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만원이나 주셨다고 자랑을 합니다. 사실 참 기특했습니다. 귀찮다고 투덜댈 법 한데,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바로 튀어나간 걸 보면 이 녀석을 잘못 키우지는 않았구나, 그런 뿌듯함도 들었습니다. 저녁 때 아버지를 만났더니, 결혼식 다녀 오시느라 양복을 입고 계셔서, 왠만하면 비 맞고 오실라고 했는데 옷 때문에 어쩔 수가 없더구나 하면서 미안해 하셨습니다. ‘에이. 그래도 비 맞으시면 안돼죠. 집에 멀지도 않은데, 잘 하셨어요.’

설마 옷 때문이었겠습니까. 아마도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용돈을 줄 핑계를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비 속을 손녀와 걷고 싶으셨을 지도 모르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이런 날이 아니면 내가 언제 딸 아이와 비 속을 걸어볼까. 어차피 내리는 비 속이니 우산으로 물을 좀 뿌리며 장난을 쳐도 좋겠고, 고즈넉한 비 속을 걸으며 하지 못한 얘기를 해도 좋겠지, 그 핑계로 용돈을 줄 수 있다면 그것도 기쁨 아니겠어.’

비 오는 날 우산 핑계를 대려면, 일부러 차를 놓고 퇴근 해야 하겠군요. 운이 없으면 쫄딱 맞을 각오를 해야겠구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내리는 비 속을 아이와 함께 걷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위험일 겁니다. 이런 좋은 팁을 가르쳐주신 아버지께, 술 한 잔 올려드려야 겠습니다. 아들은,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더 좋아한다 하더니, 딱 제가 그 짝인 모양입니다. / FIN
 
2009/09/10 - [사랑하며 사는 삶] - 라면 - 아빠가 딸에게 가르쳐야 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3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9.09.13 09:50 ADDR 수정/삭제 답글

    아니.. 다희가 수술했나 싶었네.. 순간.. ^^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9.13 20:06 신고 수정/삭제

      ㅋㅋ 마땅한 이미지가 없어서 플리커에서 찾아넣었더니 글쎄~ ㅋ

  • Favicon of http://no1salaryman.tistory.com BlogIcon 정현아범 2009.09.13 23:10 ADDR 수정/삭제 답글

    101가지까지 가남요..^^
    울 녀석들은 할아버지는 갖다 드려도..
    아범은 모른 척 할 듯..ㅡㅡ;

    •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BlogIcon '레이' 2009.09.13 23:17 신고 수정/삭제

      하하, 설마 모른척 할꼬!

      가는 데까지 한 번 가보려 생각 중일세~ ㅎ